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유 Jun 11. 2020

귀국, 다시 콜롬비아로

살사 음악은 나의 어깨춤을 추게 해

한국에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칼리에 며칠이라도 더 있고 싶어서 보고타 가는 국내선 항공권을 버렸고 보고타에서 뉴저지 가는 국제선 항공권을 변경했다. 원래 계획은 칼리 1주일, 에콰도르 1주일 후 미국 찍고 한국행이었는데 에콰도르도 포기하고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도 포기하고 일정을 확 줄여 칼리에서만 오롯이 18일 체류했다. 이래저래 일정을 늘려왔지만 결국 떠나는 날은 오고야 말았다. 마지막 3일은 칼리의 예수상이 있는 크리스토 레이도 가고 자주 가던 한식당인 우리무리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갔다. 떠나기 전 날엔 생전 처음 워터파크도 가봤는데(한국에서도 안 가봄) 물을 무서워하는 나에겐 큰 도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했던 것은 역시 살사 클럽!

친구들과 간 크레스토 레이

그냥 보내기 아쉬운 마지막 밤, 제이슨이 주도하여 이 사람 저 사람 모여 함께 살사 클럽에 가게 되었다. 같이 살사 클럽 투어를 한 친구들과 살사 학원 선생 브라이언도 만났다. 이래저래 급 다국적 모임이 되어 같은 테이블을 잡고 앉아 럼을 마시고 춤추고 놀았는데 꽤 재미있었다. 살사부터 바차타, 메렝게에 레게톤 음악까지! 호스텔 근처에 이렇게 괜찮은 클럽을 이제야 처음 왔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마지막 날 밤, 갔던 첫 클럽

근데 인원이 많은지라 어수선한 분위기였고 나중에 합류한 다른 친구들이 멩가쪽으로 이동하자고 해서 갈 사람은 같이 가기로 하고 2차 살사 클럽이 있는 멩가로 갔다.

칼리에서의 마지막 클럽은 멩가의 카페미띠에라

마지막 밤이고 마지막 클럽이라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오로지 살사와 바차타를 배우고 클럽만 다니며 생활한 콜롬비아 칼리에 정이 많이 들었나 보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살사 출 일은 없겠지. 한국은 뉴욕 살사만 추니까 콜롬비아 살사를 배운 나랑 같이 춤출 사람도 없겠지. 마지막 클럽에서 같이 놀다가 먼저 가보겠다던 아미고와 다리아나도 다시 클럽으로 돌아왔다. 나를 혼자 두면 안된다고 하며 다리아나가 다시 오자고 했단다. 괜히 고마움! 막 흥이 나진 않았지만 마지막 밤을 보내기 좋았던 클럽. 그러던 와중에 빅터 동생 리나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넌 우리 친구고
우린 너의 가족과도 같아.
언제든 다시 와. 기다릴게.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 울지 말라고 다독여주는 리나가 너무 고마웠다. 그녀는 스페인어만 할 줄 알았고 난 스페인어를 거의 못 했기 때문에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도 별로 없었는데 학원에 오며 가며 인사한 게 전부였다. 구글 번역기로 대화했는데 마지막으로 나에게 보여준 이 주옥같은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언제더라... 여행지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해어지며 울었던 게 2013년 인도네시아 가족들이 마지막이었던 거 같은데.. 길에서 눈물 콧물 다 쏟아내며 몇 시간 같이 있었던 가족들에게 무한 감동받았던 그때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 한 마디의 말이 나의 심금을 울려 내가 다시 콜롬비아에 올 생각을 했던 것일까?


매사에 신중한 편이지만 간혹 즉흥적인 결정을 내릴 때는 뒤도 안 돌아보는 편이긴 하지만.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은 꼭 가야 하니! 그렇게 다음 날, 버스표가 없어서 돌아오는 일은 없어야 했기에(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 미리 버스표를 사러 터미널에 갔다가 살사 학원으로 향했다. 빅터랑 인사하고 다른 선생들이랑도 인사를 나누고 뭔가 헛헛한 기분을 안은 채 호스텔에서 무료한 오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아미고의 배웅을 받고 호스텔을 떠났다. 그렇게 콜롬비아 칼리에서의 18일은 끝났다. 달콤한 꿈을 꾼 것 같은 이 기분. 그러나 다시 꿀 수 없는 꿈에서 깬 기분이었다.

빅터와의 마지막 사진
호스텔에서 종종 포켓볼도 쳤다. 소싯적 포켓 신으로 불리운 나.
칼리에서의 마지막 날, 정든 호스텔을 떠나며 한 컷

뉴욕에서 며칠을 보내고 한국으로 가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에 잠겼다. 장장 5개월 간의 타국 생활이 끝났다. 칸쿤에서의 두 달, 멕시코와 과테말라를 3년 만에 다시 여행하는데 한 달 반, 그리고 콜롬비아 한 달 반, 이제 집으로 간다. 제대로 여행을 했던 것은 두 달 반 정도였다. 한 곳에서 오래 체류한 적이 많았기에 예전처럼 진정한 배낭여행자처럼 여행하진 못했다. 프리랜서로 밤마다 하는 일도 있어 더더욱 그랬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5개월 간의 여정, 특히 콜롬비아 칼리에서의 나날들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국에 돌아가니 부모님이 엄청 반겨주신다. 그리고 거의 반년만에 돌아온 다 늙은 딸은 돌아온 지 3일 만에 이런 말을 해버렸다.

저 다음 달 말에 콜롬비아 다시 가요


내 딸이 저랬으면 혈압 어지간히 올라왔을 것 같다. 물론 당시에는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음 달이 프리랜서 일도 끝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콜롬비아로 다시 가면 진정 백수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것까지 이야기하기엔 내 용기가 부족해서 가서 보따리 장사꾼처럼 사업하는 동생 물건도 떼다 주고(이건 진짜였다) 몇 개월 있다 오겠다고 했다. 항상 아버지는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하시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계셨을게다.


3일 만에 콜롬비아행을 결정한 이유는
오로지 내 온 몸을 휘감고 있는 살사 때문이었다.


머릿속에 살사 음악이 떠나질 않았으며 매일 방에서도 살사 음악만 들었다. 어깨춤은 쉬질 않았으며 지인을 만나러 나갈 때도 살사 음악을 들으며 전철 플랫폼에서는 스텝을 소심하게 밟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사구를 처음 배운 사람이 자려고 누워 천장을 보면 당구 다이와 공들이 선을 그려가며 움직이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안 되겠다!
콜롬비아로 다시 가야겠어!


이 삼일 밤을 고민하다가 항공권을 검색, 콜롬비아 보고타행 편도 항공권을 질러버렸다. 저질러버렸어!

매거진의 이전글 컬처 쇼크, 레게톤 클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