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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유 Aug 04. 2020

부엌데기는 나가서도 부엌데기

초대받은 곳에서 마스터 셰프가 되다


7남매 장남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갖가지 제사에 명절에. 그 긴 세월 동안 어머니의 집안일을 도와드리며 조금씩 지쳤던 것 같다. 다행히 청소년기에는 제사를 지낸 기억이 많이 나지 않는다. 내가 고등학교 3년 내내 방학도 없는 (휴가는 있음) 전교생 기숙사 학교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는 전 담당 작은 엄마를 옆에서 돕는 일을 하다가 20대부터 혼자 전을 부치기 시작했고 20대 중반부터는 전 부치기부터 모든 설거지를 도맡아 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깨너머로 배운 음식 솜씨. 신기한 것이 어머니의 김치 맛이 기억나더라. 방금 만든 김치 맛을 기억해서 만들면 익은 후의 김치도 엄마 김치와 비슷했다.


어딜 가나 부엌은 내 차지다.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닌데도 그렇다. 하다못해 친척집에 가서도 고모들이 당신 딸들이 아닌 나를 부를 정도니까. 문제는 나 역시 남의 집에 가면 가만히 있는 성격이 못 된다. 뭐라도 도울 것이 없나 계속 부엌을 서성인다. 가만히 앉아서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 많던데. 아이고 내 팔자야.


“엄마 팔자 닮아서 난 부엌을 못 벗어날 거야”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서른이 다 되어 배낭여행을 시작하면서 그런 불평불만이 사그라들었다. 바꿀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 나이 먹음이 나에게 주는 또 다른 깨달음일지도.




쿠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콜롬비아에서의 생활은 여전했다. 배고프면 일어나 요리를 하고 밥을 먹고 살사 개인 레슨 학원에 가거나 그룹 레슨 학원에 갔다. 다시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쉬다가 살사 클럽에 다녀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명절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특별한 일인 것 같다. 식구처럼 같이 구정 음식을 먹은 키미와 수동이 덕분에 적적하지 않았다. 나는 에어비앤비에, 키미와 수동이는 호스텔에, 명절 음식 나눔 이후 맥주 마실 때 나를 호스텔로 불러 한 잔 하다가 살사 클럽을 갈까 말까? 고민도 하고. 그냥 맥주나 마시자 하고 자정 넘어서까지 수다 삼매경에 빠지기도 했다.


7년 넘게 자전거로 세계 여행 중인 수동이는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중간중간 중국에 들어갔다 오기도 했지만 항상 자전거로 여행한다고. 수동이는 나보다 한 살 많았다. 같이 있는 시간이 참 즐거웠다. 뭘 해도 어찌나 웃기던지. 게다가 요리도 잘해서 수동이가 키미 아침을 해줄 정도였다.


언니~ 오늘 호스텔에서
다 같이 음식 만들어 먹기로 했어요
언니도 오세요~


오호라!! 나 초대받은 거?라는 생각을 하기 무섭게 뭘 만들어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들고 가기 편하고 외국인이 잘 먹는 음식, 그게 좋겠다!


웬만한 외국인은 다 좋아하는 소시지 야채볶음과 레디쉬 깍두기, 수제 양배추 양파 피클, 그리고 키미가 호스텔 친구들에게 매운맛을 보여주고 싶대서 팔도 비빔장도 가져가기로!


살사 박물관과 콜롬비아 칼리의 트럼펫


식사 초대를 받은 날 낮엔 칼리에 있는 살사 박물관에 갔다. 키미와 수동이 포함 어제 술을 같이 마신 사람들과 같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 앞에 광장에 있던 음악이 나오는 트럼펫에서 콜롬비아 살사를 춰 본 것은 나름 신선했다.


수동이와 콜롬비아 살사를! 저 안에서만 들리는 살사 음악


그룹 살사 레슨을 마치고 시간 맞춰 간 호스텔에는 열심히 전을 부치는 키미와 중국요리를 만들고 있는 수동이가 나를 맞아줬다. 어제 같이 술 마신 친구 예수와 중국 사천 출신 친구도 있었다.


부엌에 가자마자 전을 보는 순간 내 입에서는 이 말부터 튀어나왔다.


“자기 전 안 부쳐봤지?”


꾸지람 듣고 자란 아이 비난하는 법 배우며, 라는 문구가 떠오르는 꼰대의 말투. 호박전을 부치는 키미에게 나오라 하고 내가 부치기 시작했다. 기름부터 충분히 두르고 계란 옷이 찢어지고 벗겨진 아이들부터 살려야 했다.


“어머나! 이렇게 두껍게 썰었어?”

“안 그래도 수동이가 두껍다고 했는데 그냥 부쳤어요 ㅎㅎ”


수동이는 옆에서 끄덕거리며 다 알아듣는 눈치. 그리하여 난 호박전을 시작으로 두툼한 계란말이까지 만들었다. 내 옆 화구에서는 사천요리를 만들던 친구가 요리의 매운 정도를 결정하기 위해 우리에게 맛보라 했다.


‘생각보다 사천요리 안 매운데?’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먹어본 결과 혀가 얼얼. 당시엔 안 매웠는데 식탁에서는 역대급 매운맛.


수시로 수동이가 와서 중국식 양배추 요리를 체크하고 스파게티로 비빔면을 만들 생각이라 면 삶기는 키미가 담당!


어쩌다 보니 내가 부엌을 진두지휘하고 있네? 허허. 남의 집에 와서도 난 부엌데기의 삶을 못 벗어나나 보다. 사실 내가 문제인 것을 안다. 전이 전이 아닌 음식이 되어도 그러든 말든 내버려 두고 음식이 되기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을 그걸 못 참았다. 나름 외국인에게 선보이는 한국 음식인데 예쁘고 맛있게 차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 같다. 그리고 내심 중국요리에 뒤지면 안 된다는 생각도 한 듯. 한국요리 부심 스멀스멀 올라오는 중.


어쨌든 키미와 수동이, 사천 출신 친구와 나의 노력으로 한중 합작 한상차림 두둥!


한중 합작 상차림_콜롬비아 칼리 아쿠아카테 호스텔 2019.02.08
호스텔 직원과 여기서 살사 수업 마치고 남은 제이슨도 합류


다들 맛있게 먹어주니 기분 좋고~ 이래서 계속 요리를 하게 되는 듯. 부엌데기면 어쩌랴? 내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흐뭇한걸! 난 어쩔 수 없는 부엌데기인가 보다. 그냥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하자. 쿠바 신장금이기도 하고. 후후.


설거지는 예수와 제이슨, 후식은 수동이가 만든 달큰 짭짤 팝콘


밥을 먹고 좀 쉬다가 키미는 다른 친구를 만나러 레게톤 클럽에 갔고 난 수동이, 페루 친구와 함께 금요일이 핫한 살사 클럽에 갔다. 앉을자리 없이 쭈그리로 있다가 맥주만 마셨던 그 날.


금요일이 핫한 살사 클럽_콜롬비아 칼리 말라마냐


“수동아! 연습해야지!”


그룹 레슨 학원에서 만난 독일 친구를 우연히 만나 같이 살사를 췄다. 그리고 춤 파트너가 없던 수동이랑도 췄다. 나름 살사를 더 많이 배웠다고 수동이를 은근슬쩍 리드하는 나.


살사는 남자가 리드하는 건데. 자중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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