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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유 Aug 13. 2020

9첩 반상 셀프 생일상_쿠바

쿠바에서의 두 번째 생일


생일 선물을 미리 받지 말걸 그랬다.


쿠바에서 코로나가 시작된 후 모든 관광객을 호텔로 이송한다기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때, A가 다른 생각하라고 미리 준 생일 선물. 그래서 이미 생일 선물도 받았겠다 막상 생일이 다가오니 더 감흥이 없었다.


쿠바에서 두 번째 맞이한 생일은 A가 생일 선물로 팔찌를 줬다. 난 뭐든 심플하고 얇은 것을 좋아하는데 판도라라니. 언젠가 A가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너도 판도라 같은 거 좋아해?”

“뭐 괜찮지. 근데 비싸서 안 사지”


돈 없는 거 뻔히 아는데 (쿠바인의 월급은 평균 한화로 대략 3만 원 정도) 나를 위해 이런 것까지 미리 사려고 여기저기 어둠의 경로(쿠바에는 판도라가 없음)를 알아보고 다녔을 것을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이 앞섰다.


일 년 전, 쿠바에서 맞이한 첫 번째 생일에는 계란 한 판과 와이파이 카드를 선물로 받았었는데. 은근 해외에서 맞이한 생일마다 난 외롭지 않았구나.


이번 생일은 생일상에 공을 들였다. 집에만 있어서 그런 이유도 있었다. 시간 부자니까. 나름 신장금인지라 내 생일은 10첩 반상을 준비하겠다고 전날 이것저것 건어물부터 꺼내 볶고 무치고 캔 따고 갖가지 음식 만드는데 분주했다. 내 생일 상 차린다고 이렇게 심혈을 기울인 것은 처음이었다. 소고기는 없어 참기름 미역국으로 대신했다.


정말 심혈을 기울인 반찬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오징어볶음. 쿠바는 오징어가 없다. 구할 수도 없다. 그나마 문어는 구할 수 있지만. 그래서 나름 짱구를 굴렸다.


마른오징어로 오징어 볶음을 만들 수 있을까?


마른오징어도 몸통은 낮에 맥주 안주하느라 다 먹었고 이제 다리만 조금 남은 상황. 다리를 물에 오래 불려 볶았다. 다리도 몇 개 없어서 양이 정말 적었는데 볶고 나니 오징어 볶음이 되네?


마른오징어로 만든 야채가 더 많은 오징어볶음


반찬의 질보다 개수가 중요했다. 내 목표는 확고했다. 10첩 반상. 왜 목표를 그렇게 잡았는지는 모르겠다. 반찬 문화가 발달한 한식을 좋아하는 내가 재료 구하기 어려운 쿠바라는 나라에서, 게다가 코로나가 시작되어 더 어려워진 이 나라에서 호기롭게 ‘나 이만큼 차려 먹었다’라고 자랑이라도 하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매일 집에만 있는 일상에 지친 나에게 나름의 선물을 주고 싶어서였는지. 어쨌든 난 애지중지하며 아끼던 치자 단무지에 고추참치 캔까지 따서 반찬 한 가지라도 더 놓으려고 애썼다.


“어라! 9첩이네?”


목표는 10첩 반상이었지만 차려놓고 보니 9첩 반상. 미완의 수 9, 그래도 어감은 9첩이 낫구나.


나중에 냉장고를 보니 반찬 한 가지가 더 있었다.

10첩 반상 아까비.


본디 반상이란 밥, 국, 김치를 기본으로 하여 그 외의 반찬 가짓수에 따라 5첩, 7첩, 9첩 이렇게 되는데 밥 빼고 국포함 나머지 반찬 종류를 세어 9첩으로 치기로 했다. 그리고 조리 방법도 중복되면 안 되고 찌개 조림 장류 등 복잡한 기준이 있지만 난 한정식 전문가도 아니니 반찬 가짓수로 퉁치기로! 퉁퉁퉁!!!


A와 함께한 9첩 반상의 생일상


내 생일 기념으로 A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플란. 미국 유럽 지역의 타르트라는데 난 처음 접해보는 것이었다. 나름 생일 케이크처럼 만들었네! 냉장고의 상추를 보더니 꽃처럼 만들어 급 데코레이션까지.


마초 성향이 강한 쿠바라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A가 나를 위해 만들어준 요리라 더 특별했다.


A가 만든 생일 케이크 플란과 다진고기를 품은 피망


“한국인들이 생일날이면 꼭 이 미역국을 먹어. 아기 낳고 산모가 먹는 국이기도 해.”


나름 미역국에 대해 A에게 설명해줬다. 보통 외국인들은 미역국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미끄덩 거리는 식감 때문에 그렇다고 들음) A는 잘 먹네?


넌 도대체... 못 먹는 게 뭐니?


혼자 먹는 밥보다 둘이 먹는 밥이 더 맛있다


코로나 시대에 쿠바에서 오랫동안 묵혀둔 내 곳간을 탈탈 털어 만든 생일 상. 스스로 너무 뿌듯해했더라는. 그리고 고마워 A야!


가지 요리 빼고는 다 한국에서 공수된 재료들로
만든 반찬이라는 것은 안 비밀


저녁은 고기반찬. 나눔 받은 돼지고기로 만든 탕수육. 튀김옷 만들어 튀기고 기름 빼고 탕수육 소스 만들어 찍먹으로 먹으면 된다.


나눔받은 돼지고기로 만든 탕수육


A가 만든 플란은 당일엔 거의 못 먹고 다음 날 커피와 함께 먹었다. 디저트 사러 가기 어려웠던 쿠바 코로나 시대, 4월도 이렇게 지나가나니.


콜롬비아 후안발데즈 커피와 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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