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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유 Aug 14. 2020

보릿고개가 스쳐 지나갔다

쿠바 코로나 시대, 고기를 얻기 위한 몸부림


 돼지고기는 애저녁에 떨어지고 훈제고기도 다 떨어졌다. 남은 건 코로나가 시작되고 거금 11쿡이나 주고 산 레몬이 가미된 치킨봉과 윙, 그리고 다진 고기뿐이었다.


 이제 돼지고기는 구하기 정말 어려워졌고 훈제고기는 씨가 말랐다. 소고기는 쿠바에서의 내 삶에서 원래 없던 존재라 생각조차 안 했다. (쿠바에서 소 매매는 불법)


 닭고기를 사려면 줄을 장시간 서야 했다. 하루 종일 서야 할 때도 있다. 닭이 들어온 날, 그 마트에는 사람들이 엄청 몰린다. 대중교통이 끊기고 다들 일터로 나가지 못하니 남는 게 시간인지라 새벽같이 나와서 줄부터 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정말 필요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이 필요해서 재판매 목적으로 사는 사람도 많았다. 재판매는 불법인 데다 쿠바 정부에서 엄격히 금지하고 있지만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는 것이 현실.


 일례로 계란 같은 경우 길에서 남들이 파는 것을 사야 하는데 그것도 문제가 된다. 재판매 물건을 사다가 걸리면 큰일 난다며 아무것도 안 사는 사람도 계란은 길에서 산다.


배급받는 계란이 아니고서야
어쨌든 계란이 필요하면 사야 하니까.


 나야 관광객이니 배급이고 뭐고 없는지라 알아서 생활해야 했다. 그래도 나름 이것저것 잘 구해오는 A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었다.


 나는 사실 채소만 먹어도 산다. 한국에서 살 때도 우리 집은 매일 김치찌개, 된장찌개가 식탁에 주로 등장했다. 친구들이나 만나야 삼겹살이라도 구워 먹었지 매 끼니 식탁에 남의 살(육류 어패류 등)이 등장하지 않았기에 그리 고기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는데 A는 달랐다. 더운 나라 사람들이 에너지 소비가 많아서 그런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닭고기 들어온 날은 장시간 줄 서고 그러는 것을 보면 닭을 좋아하는 건가?


 어느 날, 쿠바의 유명한 N호텔에서 장이 열린다 했다. 간혹 이런 대형 호텔에서 식재료를 풀기도 했는데 가격은 말할 것도 없이 비싸다. 물론 엄청 비싼 건 아니지만 쿠바인들이 사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호텔 근처에 사는 S가 N호텔에서 사 왔다며 나에게 이것저것 사진을 보내줬다. 그것도 남자 친구가 서너 시간 기다려 사 왔다고 하는데 난 A에게 사 올 수 있냐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 부러운 마음 접어두고 혹시나 해서 A에게 물어봤다.


“혹시 N호텔에 아는 사람 없어?”

“없어. 왜?”

“아니... S가 거기서 고기 샀다는데...”

“아! 한 명 있다!”

“진짜??!!”


 그리하여 급 성사된 지인 찬스.


 돼지고기 등심과 닭가슴살. 내가 정말 좋아하지 않는 퍽퍽한 부위였는데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고기 못 구하는 마당에 구했으니 이것만으로도 만족! 쿠바에 살다 보면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것에도 감사하게 된다는.


쿠바에서 고기 자르는 기계를 본 적이 없다. 뭉텅이 돼지고기 등심
양념된 닭가슴살


 소분의 여왕 S의 조언에 따라 손가락 반 마디 두께로 얇게 썰었다. 그리고 하나씩 비닐에 싸서 냉동실에 보관하면 끝. 소분을 미리 잘해둬야 나중에 요리할 때 편하다. 지금은 소분을 잘하는 편이지만 다 썰어놓고 비닐 하나에 다 넣는 바람에 개고생 한 적이 있기도 했다. 닭가슴살은 예전에 허리가 안 좋아 허리 근육 키운다고 PT 받을 때 먹고 안 먹었는데 이렇게 덩어리로 올 줄이야. 이것도 다 소분해서 위생봉지에 각개 포장 후 냉동실행!


한국에서는 생고기 만질 일이 정말 없었는데
쿠바에서는 생고기를 안 만질 일이 정말 없다.


썰다보니 두깨가 들쭉날쭉한 돼지고기 등심


소분의 철칙 : 끼니당 먹을 양으로 나누기


 그렇게 보릿고개가 찾아올 줄 알았는데 스쳐 지나갔다. 이것 외에도 사실 S가 고기나 닭다리 얻은 날 한 번이라도 맛보라고 소분해둔 걸 챙겨주곤 했는데 그때 정말 나에겐 S가 한 줄기 빛 같은 존재였다. S는 나름대로 내가 한국 음식이나 재료를 이것저것 챙겨줬다고 고마워했다. 그래서 뭐라도 보낸 날에는 없는 살림에 물물 교환하듯 주고받았다. 대량만 파는 훈제 닭다리를 살 엄두를 못 냈는데 S가 대량 구매해서 조금 나누기도 했다.


S에게 보낸 건새우와 김치, 커피와 멸치 등
S에게서 받은 식용유, 나초, 우유와 귀한 닭다리 등


 사실 여기 쭉 살던 사람도 아니고 여행하고 아바나에서 한 두 달 있다가 떠날 예정으로 온 S는 이래저래 고생이 많았다. 살림살이가 다 있는 것도 아니니 까사(숙소)에 있는 걸로 사용해야 하니까. 특히 한식 재료가 부족해서 장류 같은 것을 조금씩 나눠줬다. 나도 언제 한국으로 들어갈지 모르는 상황이라 팍팍 퍼줄 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주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뭔가 호의를 베풀 때 대가를 바라면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누군가 자기는 안주냐 섭섭해한다면 그건 나이 헛 먹은 것. 가장 없는 사람 도와주는 것에 뭐라 하는 사람만큼 별로인 사람도 없다.


 5월 초, 고춧가루가 떨어졌다는 C오빠에게 인편으로 최대한 드릴 수 있는 만큼 보낸 적이 있다. 평소에 조건 없이 잘해주시는 분이라 꼭 도와드려야 했다. 그날도 차편으로 친구를 보내 크리스탈 맥주 마셔보라며 몇 병 보내주셨다는. 난 고춧가루에 파래김 등을 보냈다. 그 이후로는 누구에게도 줄 수가 없었다. 딱 내가 필요할 만큼만 남기고 다 보냈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쿠바는 그럭저럭 살만 했다. 소시지를 사려고 줄 서지 않아도 되었고 냉동 닭다리는 마트에 널렸었다. 돼지고기는 길가의 상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샴푸도 마트에 많았다.


휴지는 작년 말부터 잘 안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지만.


 코로나가 시작되고 현지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사는데 불편해졌다. 이 나라에서는 고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으니. 공급보다 수요가 많은 데다가 사재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더 어려웠다.


돼지등심 스테이크 & 갓뚜기 야채스프


 돼지 등심을 구한 날, 돼지 등심 스테이크를 만들었다. 아껴둔 갓 뚜기 야채수프도 개봉했다. 나름 이것저것 신경 썼다. 경양식이라는 단어는 쓰는 나이라 이렇게 차리면 맞나? 하며 만들었다. 난 한식 말고는 양알못이라. 역시나 등심은 퍽퍽했다. 그래도 장조림이나 김치찌개, 탕수육으로 쓰면 되니까 괜찮다.


 다행인 것은 나에게 고기가 생겼다는 것. 아직 살만하다는 것. 4월 중순쯤부터 집 근처 1분 거리의 야채시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것도 나에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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