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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유 Aug 11. 2020

나의 소중한 소면

쿠바 코로나 시대, 소면 일기


“고추장 된장 고춧가루 액젓만 있으면 어디서든 살 수 있어요”


해외 생활에서 김치와 장류만큼 중요한 것이 라면이나 소면 등의 면류다. 특히 소면은 한인 마트나 한국에서 공수하지 않으면 접할 수가 없는 특별한 존재. 그래서 어딜 가도 소면은 꼭 챙겨 오는데 라면도 구하기 어려운 쿠바에서 소면은 정말 소중한 존재다.

(가끔 베트남 라면 파는 곳이 있었으나 코로나 시대엔 없음)


코로나가 시작된 쿠바에서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이 쟁여둔 쌀과 소면, 라면이었다. 식량이 될 수 있는 것들이기에 더 그랬다. 라면에 비해 제일 적게 남은 소면은 아껴먹어야 했다. 2월에 칸쿤 사는 친구가 놀러 오면서 소면 한 봉지를 주고 갔는데 그거 아니었으면 소면 구경도 못할 뻔했다. 원래 갖고 있던 소면이 한두 번 정도 먹을 양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밥만 먹다가 간혹 소면으로 만든 비빔국수나 잔치국수, 어묵이 있다면 어묵국수라도 먹는 날엔 어찌나 행복한지. 비빔국수야 면만 익으면 뚝딱이라 자주 만들어 먹곤 했다.


세상 제일 쉬운 것이 비빔국수.


난 뭘 먹어도 최대한 완벽하게 먹고 싶어 모든 재료가 갖춰져야 요리를 하는 편이다. 그리고 되도록 먹을 때는 제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다. 그래서 비빔국수를 먹을 때면 피클을 꼭 만들어 둔다. 비빔국수를 먹다 보면 단무지나 피클 같이 상큼한 뭔가가 당기기 때문이다. 단무지를 먹기엔 너무 호화롭기에 (단무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짜장밥과 먹기 위해 아낌) 담그기 쉬운 피클이 제격이었다.


쿠바에서 만들어 먹은 비빔국수, 피클은 덤


간혹 잔치국수가 먹고 싶을 때가 있다. 멸치육수를 만들고 볶음김치와 계란지단, 파를 송송 썰어서 면 위에 올린 후 육수를 부으면 캬! 그 맛은 형용할 수 없다. 한국에서는 사실 잔치국수 먹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직접 만들어 먹을 생각을 못했는데 해외에 그것도 정말 뭐든 없는 쿠바에 살다 보니 먹고 싶은 것은 무조건 만들어 먹어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다.


한국에서야 잔치국수 아니어도 먹을 것이 무수히 많으니 꼭 그것을 고집할 필요도 없겠지만. 생각해 보면 한국에 있을 때도 비빔국수는 곧잘 해 먹었다. 제일 간편하고 만들기도 쉽고 맛있으니까.


쿠바 코로나 시대에 만들어 먹은 두 번의 잔치국수


정말 새콤하고 시원한 것이 당길 때는 김치말이 국수가 최고다. 물론 김치는 없고 김칫국물로만 만든 냉국수라 김치말이라고 말하기도 좀 그렇지만. 정말 아끼고 아껴서 5월까지 먹은 배추김치가 남기고 간 김칫국물에 설탕을 살짝 넣고 새콤 달콤한 국물을 만든 후, 얼음 동동 띄워 익힌 소면을 냉수마찰시킨 후 만들어 둔 김칫국물을 부으면 끝. 김칫국물부터 한 모금! 가슴속 깊숙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그 시원한 맛은 마치 내가 한국에 있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게 해 준다.


쿠바에서 먹은 김치말이 국수에도 피클은 필수


2018년에 칸쿤 친구네 집에 몇 달 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친구가 만들어 준 어묵국수가 갑자기 생각나 만들어 먹기도 했다. 멸치 육수와 어묵 국물에 삶은 면을 넣어 먹는 국수로 간장 베이스의 양념장과 함께 먹으면 꿀맛이다.


쿠바에서 만들어 먹은 어묵국수


그렇게 나의 소중한 소면은 나를 한국으로 소환시킬 수 있을 정도의 맛을 선사했다. 겨우겨우 5월까지 소면을 먹긴 했지만 그 사건이 있고 나서는 횟수가 확 줄었다.




4월의 어느 날, 내 생일이 오기 전 A와 다투고 난 다음 날이었다. 그즈음 싸울 일이 잦았다. 코로나로 인해 쿠바에서 자체 셀프 격리 중이었던 첫 한 달이 제일 힘들었다. 매일 집에 있으니 우울감이 종종 찾아왔고 매일 뭘 해 먹어야 하나 그런 고민 외엔 잉여로운 생활뿐이어서 그랬을게다. 그나마 도보로 30분 거리에 사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S가 있어 다행이었다. 우린 매일 중간중간 ‘오늘 뭐 먹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냈었다.


A는 부엌에서 뭔가 뚝딱뚝딱 음식을 만들더니 방에 있던 나에게 나오라고 했다. 못 이긴 척 거실로 나와보니... 세상에 마상에...


앗!!! 이걸 썼어??!!


본인이 만든 수제 토마토소스로 스파게티를 만들었는데 스파게티면이 아니고 소면이네?? 게다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


스파게티면을 못 찾아서 소면을 썼다는 A는 이 상황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쿠바 사람인 A에게는 그냥 면은 면일뿐.


“스파게티면 여기 있잖아...”

“어? 거기 있었네~?”


나를 위해 음식을 만들었는데 화를 낼 수도 없고, 대량의 소면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나오는 한숨은 어쩔 수 없고, 저 양이면 수 번을 먹을 수 있는데... 소면은 다 불어서 숟가락으로 퍼먹어도 될 정도였지만 토마토소스 때문인지 나름의 맛은 있었다. 단지 소스에 비해 면이 너무 많았을 뿐.


나의 소중한 소면이 이렇게 절반 이상 한 번에 사라질 줄은 몰랐다. 너무 당황스럽고 이까짓 소면 때문에 왜 내가 이 오만가지 생각과 복잡한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 한탄스러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나 정말 우울증인가 보다.


A가 만들어준 소면 스파게티


이미 지난 일, 잊자! 다행히 5월에 남은 소면으로 세 번의 맛있는 국수 요리를 해 먹었으니. 그래도 그 날 소진한 소면이 가끔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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