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에서 성스러운 쌀을 만나다
쿠바에 코로나가 시작된 후로는 스시쌀(둥근쌀)을 산 적도 본 적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둥근 쌀을 산 것이 2월 중순쯤. 그때 영화 기생충을 상영한다고 해서 베다도 쪽으로 나갔다가 쌀을 10봉지 사 왔고 다음 날 또 가서 더 사 왔지만 그 후 지인들이 쿠바로 놀러 와 같이 매일 집 밥을 해 먹느라 쌀을 많이 소진했다. 그 스시쌀이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쿠바에서 구하기 그나마 쉬운 베트남 쌀과 섞어 먹고 있던 중 A가 쌀 사진을 하나 보내줬다. 항상 돌아다니다가 둥근 쌀을 발견하면 무조건 사라고 말해왔는데 드디어 발견한 것이다.
그 날은 시간이 애매해서 못 가고 다음 날 사러 가기로 했다. 어쨌든 마트에 가면 한두 시간은 기다려야 하니 마음먹고 가야 했다. 그렇게 쿠바에 코로나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마트에서 줄을 섰다. 당시 ID카드에 등록된 거주지역이나 집주인의 동의를 통해 발급된 마트 이용을 위한 거주지 확인 카드가 없으면 집 주변 마트 이용이 어려웠는데 다행히 미리 받아둔 카드가 있어 마트 줄을 설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소수의 사재기하는 쿠바인들 때문에 생긴 것이다. 시간 부자인 그들은 여기저기서 하루 종일 기다린다 해도 매일 그렇게 사두고 웃돈 얹어서 재판매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돈 버는 방법.
거의 1시간 반을 기다려 입성한 마트, 마트라고 하기엔 너무 작으니 슈퍼마켓 정도 하는 게 맞겠다. 내가 필요한 물건을 진열장에서 가리키거나 말하면 직원이 계산대로 가져와서 계산하는 시스템인데 사재기 방지용 1인 구매 제한이 있었다. 예를 들면 쌀은 인당 2봉지, 휴지는 인당 4롤 1봉지, 다진 고기는 인당 2개 등 이렇게 구매 제한이 있어 전처럼 10봉지씩 살 수가 없었다. 간혹 둥근 쌀을 사는 현지인이 있긴 하지만 보통의 쿠바 사람이라면 둥근 쌀을 사지 않는다. 고로 우린 앞 아저씨에게 쌀을 사냐고 물어본 후, 사줄 수 있냐고 하여 두 봉지를 더 살 계획을 가졌다.
하지만 입장 전, 뭘 살 건지 직원이 물었을 때, 아저씨에게 협조를 구하기 전이어서 아저씨가 쌀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계산할 때 아저씨가 쌀을 사겠다 하니 직원이 뭐라 뭐라 하더라. 우여곡절 끝에 아저씨 몫의 쌀을 사긴 했지만 혹여나 못 살까 봐 걱정했다. 그렇게 3인 분치 쌀 6봉지와 휴지 그리고 다진 고기를 샀다. 쌀이 어찌나 성스럽던지 보기만 해도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아 이거 사람 할 짓 못되구나
집에서 도보로 5-7분 거리의 마트에서 기다리는 시간만 1시간 반이니. 닭고기라도 들어온 날은 줄이 미어터져서 대기 시간만 4-5시간 이상이다. 허리가 그리 좋지 않은 나로서는 절대 선택하지 않을 방법이다. 하루 종일 기다리면 정말 허리 절단 난다. 작은 돈 아끼려다가 큰돈 잃는 셈. 난 고작 그것의 절반의 시간만 기다렸는데도 허리 아프고 더운 날씨에 너무 힘들었다.
지금까지 1년 넘게 쿠바에 살면서 계란도 길에서 사람들이 내놓은 것을 구해왔다. 배급 계란이 아니고서야 현지인이 파는 계란을 산다 하면 다 불법이다. 하지만 난 외국인이고 계란을 배급받을 수 없다. 고로 길에서라도 구해야 한다. 길에서 파는 것은 매매 자체가 불법이라 걸리면 큰일 나고 뭐고 그런 말 할 필요도 없다.
이미 계란 그렇게 해서 계속 사 먹었잖나?
필요하면 사야 하는 것이고 시간과 체력 남아돌면 마트 줄을 하루 종일 서면 된다. (계란은 마트에서 판매하지 않음) 돈이 있어도 그런 곳에 쓰는 것이 아까우면 허리 절단 나더라도 장시간 기다려서 사면되긴 하다. 하지만 웃돈이라고 해봤자 한국 사람들 기준에서 보면 얼마 안 되는 돈이기에 뭐든 우선 보이면 웃돈을 주고라도 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계란도 정가보다 비싸게 팔기 때문에 쭉 웃돈 주고 사 먹어 왔는데 뭐.
둥근 쌀을 구한 날, 베다도에 사는 C오빠가 돼지고기를 구했다며 A를 보내라고 하셨다. 오래전부터 돼지고기 구하시면 알려달라고 말씀드렸었는데 드디어 해내신 게다. 나눔 천사 C오빠는 정말 뭐 바라지도 않으시고 조건 없이 나눠주신다. 그래서 난 그만큼은 못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드리려고 하는 편이다.
근데 지금 이 코로나 시대에 쿠바에서 구하기 엄청 어려운 돼지고기를 구하셨다니!! 게다가 전부터 건너 건너 S가 누군지는 알고 계셨던지라 S를 도와야 한다고 종종 말씀드렸었는데 일면식도 없는 S의 돼지고기까지 준비하셨단다. 당신은 천사??!!
난 뭘 드려야 할까 하던 중에 둥근 쌀이 떨어져 간다고 하셔서 방금 구한 쌀 6봉지 중 2봉지를 A편에 보내겠다고 했다. 얼마 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래도 나름 장시간 기다려서 구한 성스러운 둥근 쌀이니. 나야 다음에 또 구하던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아님 현지 쌀이랑 섞어 먹어도 되니까. 둥근 쌀 구경도 못했던 S에게도 둥근 쌀 필요하냐 물으니 길쭉한 쌀 먹어도 괜찮다고 하여 마음이 덜 불편했다. 집주인이 나 몰라라 하는 바람에 마트 입장 티켓도 없어 마트도 마음대로 못 가던 S가 계속 신경 쓰였는데 나름대로 이래저래 먹고 살 방법을 찾는 S를 보니 한 시름 놓였다. 사실 S덕분에 종종 끊이지 않고 닭다리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또 다른 축복이었다.
(쿠바는 냉동 닭다리만 파는 곳이 많음)
다음 날, C오빠에게서 돼지고기를 받았다. 정말 이 사람 저 사람 다 나눠주셨더라. 어찌나 감사한지. 얼마 안 되지만 그래도 둥근 쌀이라도 드려서 마음이 덜 무거웠다. 21세기에 서로 음식 재료를 나눔 하는 이 아름답고도 씁쓸한 풍경이란.
2020년에는 백 투 더 퓨처처럼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닐 줄 알았는데 그건 정말 영화일 뿐. 쿠바에 사는 나는 쌀과 돼지고기를 구했다고 행복해하고 있는 웃픈 현실. 쿠바에 있으니 사람이 점점 더 원초적이고 단순해지는 것 같다. 먹을 걱정만 하면 되니까.
근데 이 돼지고기를 어쩐다? 봉지를 열어보니 역시나 돼지 본연의 모습을 가지고 있던 돼지고기. 어떻게 손질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A의 돼지고기 발골 실력에 또 한 번 놀랐다. 돼지껍질만 따로 쫙 벗겨내는 솜씨에 눈이 휘둥그레.
“정육점에서 일했었어?”
“아니, 집에서 파티하면 자주 했던 일이야.”
“아.. 한국에서는 고기 손질할 일이 없어. 다 손질되어서 나오니까.”
정말 쿠바에서나 생고기 만지작거리며 고기 썰고 손질하지, 한국에서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일 아니던가? 다 부위별로 포장되거나 정육점에서 알아서 썰어서 주니까.
이래저래 또 쿠바에서 살면서 한국에서의 삶에 감사하게 된다. 생고기 정말 만지기 싫어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잘 만진다는.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