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그 많던 샴푸는 다 어디로 갔을까?
바야흐로 2015년 12월, 처음 쿠바 여행을 왔을 때 일이다. 도무지 어디에 슈퍼마켓이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그 시절, 저기가 슈퍼마켓이라며 알려주던 어느 여행자의 말을 듣고 모처에 들어갔었다.
엥? 뭐가 슈퍼마켓이야?
진열대는 텅텅 비어있었고 여기가 슈퍼마켓 맞나 깊을 정도로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필요한 물건을 말하면 서있던 직원이 허리를 굽히거나 쪼그려 앉거나 뭔가 아래쪽이나 뒤쪽에서 찾아왔다. 물론 내가 원하는 것을 다 갖고 있진 않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곳에서도 뭔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첫 쿠바 여행을 가기 반년 전, 친한 친구가 먼저 쿠바에 다녀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줘서 그렇게 많이 놀라진 않았다.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진 않았다. 단지 비닐봉지나 휴대용 장바구니를 챙겨가라는 말만 기억난다. 뭘 사도 비닐봉지를 안 준다고. 그 친구나 나나 세계 여러 나라, 특히 동남아시아 위주로 배낭여행을 많이 해와서 여행은 여행일 뿐 철저한 계획 같은 것은 무시하고 물 흐르는 대로 다니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쿠바는 다른 나라에 비해 좀 특이한 면이 많긴 했지만.
그렇게 정말 아무것도 없는 나라라는 인식이 앞섰기에 3년 만에 다시 쿠바에 왔을 때 난 샴푸며 기타 등등을 다 챙겨 왔었다. 근데 이게 웬걸? 2019년의 쿠바는 샴푸가 지천에 깔려 있었다. 브랜드도 어찌나 한 두 가지던지. 세달 (SEDAL) 아니면 선실크 (Sunsilk). 간혹 로레알이나 도브도 있긴 했지만 그건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었고 가격대가 두 배가 넘으니 열외로 치자.
그랬던 샴푸가 코로나가 시작되고 자취를 감췄다. 마트에 가려면 뭘 사든 줄을 서야 했고 마트에 닭이라도 들어온 날에는 줄이 특히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모든 마트에 샴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행히도 2월쯤 샴푸를 두어 개 미리 사둔 것이 있었다. 평소엔 하나씩 사는데 그 날은 왜 두 개를 샀는지 모르겠다. 아마 쿠바에서 가장 많이 파는 세달 샴푸보다 용량이 적은 선실크라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전에도 샴푸를 사려면 줄을 섰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샴푸 걱정 없이 4월 중순까지 샴푸를 썼다. 그리고 샴푸를 사야 할 때가 왔다.
쿠바에서는 뭐든 마지막 제품이 남으면 절반 정도 썼을 때부터 하나 사 와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기 시작한다. 식용유가 특히 그렇고 화장지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뭐든 하나는 여유분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똑 떨어진 순간에 구하려고 돌아다닌다고 당일에 바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미리미리 구해둬야 한다. 한 때 샴푸는 그렇게 지천에 널렸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바디클렌저는 비자가 만료될 때마다 멕시코나 콜롬비아에서 사 왔기에 문제가 없었다. (쿠바에서 파는 바디클렌저는 비싼 편) 이제 샴푸를 사러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할 판.
마트에서 장시간 줄을 선다 해서 샴푸를 구하리란 보장도 없으니 길에서 재판매하거나 해외에서 샴푸를 사 온 사람들이 파는 것을 구해야 했다. 이런 것 자체가 쿠바에서는 불법이다. 결국 급한 마음에 여행용으로 갖고 있던 세면 가방까지 열어 며칠을 버틸 수 있나 샴푸를 찾아보기까지 했다.
샘플 샴푸 좀 많이 사둘걸
그래도 2-3일에 한 번씩 머리를 감는다고 치면 보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밖에 나갈 일이 없으니 마음만 먹으면 머리를 아주 가끔 감을 수도 있겠지만 소싯적 오일뱅크라 해도 과하지 않았던 나에게는 머릿기름 좔좔 흐르는 일이 잦은지라 그렇게 살기엔 매일 머리를 긁적거려야 하는 부작용을 견뎌야 했다. 어쨌든 난 샴푸를 구해야 했다.
샴푸 타령을 며칠 했더니 A가 어느 날 왓츠앱으로 샴푸를 고르라고 했다. 하나는 카모마일, 하나는 계란... 계란???!!! 쿠바에서 계란 구하기란 마음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긴 하지만 (쉽지 않다는 뜻) 그렇다고 샴푸까지 계란이 들어간 것을 쓰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카모마일을 선택했더니 이미 누가 찜 했다네? 그럼 치우던가... 결국 조금 더 비싼 이름 모를 어느 흑발의 여인 그림이 그려진 샴푸를 구할 수 있었다.
아저씨가 왜 저렇게 샴푸를 잡았나 했더니 뚜껑이 안 닫히는 불량품이었다. 그래도 샴푸 구해서 다행. 생각보다 이 샴푸는 품질이 괜찮은 편이었다. 구글을 찾아보니 브라질산 샴푸네? 참 멀리서도 왔다.
비교를 하자면 세달과 선실크랑 비슷하지만 좀 묽은 느낌이 있어서 숨풍 숨풍 닳았다는 것이 문제. 샴푸가 어찌나 빨리 줄던지. 결국 샴푸를 한 달 반 만에 다시 구해야 했다. 그렇게 나에게 온 망고향만 나는 투명한 대용량 샴푸.
어라? 이 아주 저렴한 느낌의 샴푸는 뭐지? 어렸을 때 이런 샴푸를 쓴 적이 있었다. 전지현이 광고하던 엘라스틴이 나오기 전, 색은 이것과 달랐던 초록색이었던, 머리를 한 번 감으면 뻣뻣해지던 그 샴푸. 당시에는 그만한 샴푸가 없었기에 불평 없이 썼지만 점점 더 부드럽고 좋은 샴푸가 나오면서 이 샴푸는 나에겐 저렴이 숙박업소에서나 볼법한 그런 샴푸의 이미지로 바뀌었다. 바로 챠밍 샴푸라고 알는지?
아주 맑디 맑은 샴푸, 챠밍 샴푸는 슈렉처럼 초록색이면서 투명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챠밍 샴푸를 아직도 팔더군. 신기방기. 품질은 더 좋아졌겠지?
그렇게 저 대용량 망고향만 나던 샴푸를 열심히 쓰다가 최근 쿠바에 달러 상점이 문을 열어 비교적 쉽게 샴푸를 구했다. 현지 쿠바 은행에 달러 계좌와 카드가 있거나 비자, 마스터 카드가 있으면 이용할 수 있는 달러 상점. 일반 상점보다 줄을 덜 오래 서고 물건이 많은 장점이 있지만 비싼 상품 위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은 단점이다.
3G 서비스가 시작된 지 일 년 반이 되었으니 마트에서 카드 결제가 가능한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그리 엄청난 일도, 놀랄 일도 아니다.
쿠바도 세상 돌아가는 것처럼 가고 있을 뿐.
난 그렇게 쿠바의 달러 상점에서 세달 샴푸보다 두 배 이상 비싼 로레알 샴푸를 샀다. 너무 비싸서 안 살 뻔했지만 망고 향만 나는 저렴이 샴푸를 썼던 내게 주는 선물로 치기로. 세달은 한화로 4천 원 정도인데 이건 9천 원이라는 것이 슬플 뿐이다. 물론 비싸서 그런가 머리를 감고 나니 머릿결이 한결 비단결 느낌이 나긴 하더라.
쿠바에 살면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고 사소한 것에 감사하게 된다. 샴푸 하나로 행복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