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에서는 없으면 없는 대로 먹고 산다
3월 말부터 국경 봉쇄를 시작한 쿠바는 코로나에 잘 대처하고 있었다. 대중교통 통제부터 지역 간 이동 금지까지, 그 후 확진자 수는 점차 줄어들어 갔다. 하지만 쿠바 사람들 습성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파티하는 것을 좋아하니 아무리 통제한다 한들 코로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이나 유럽에 사는 쿠바인들이 쿠바로 들어와서 홈파티를 열거나 자가격리를 하지 않아 전염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래저래 뉴스는 매일 코로나 관련 소식을 전해주고 사건사고 없는 쿠바의 지금 모습을 보여줬다. 뉴스에서 가장 많이 본모습은 마트 줄 서는 쿠바인들과 사재기를 해서 정부에 발각되어 모두 몰수당하는 모습이었다.
외국인인 내가 쿠바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잘 먹고 잘 살기. 영주권자야 본인이 사는 나라니 떳떳하게 살던 대로 살면 되겠지만 난 어쨌든 관광객 신분이다. 이런 시국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게 낫다. 그래도 예전부터 쟁여둔 한국 음식들이 있어서 쿠바에서 코로나를 맞이한 봄의 내 부엌은 풍요로웠다.
이렇게 잘 챙겨 먹었던 적이 있을까 할 정도로 없으면 없는 대로 먹고사는 일에만 집중했다. 배추와 무가 없어도 근대나 레디쉬, 또는 양배추나 오이로 김치를 담가 먹고 한식 만드는데 재료가 부족해도 다른 차선책의 재료를 써가며 요리했다. 밖에 나돌아 다니기 좋지 않았던 때라 집콕 생활을 하며 삼시세끼 저리 가라 매일 뽐내기 대회라도 출전하듯 식단 겹치지 않게 요리하며 잘 차려 먹고살았다.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집 근처의 야채시장에 가는 일이 나의 유일한 외출. 도보로 1분 거리로 스무 번 정도 엎어지면 닿을 수 있는 시장에 자주 갔던 이유 중 하나가 망고. A는 키믹(억지로 뭔가를 써서 익혔다는 뜻으로 케미컬을 키믹이라 칭함) 망고라며 망고를 절대 사 오지 않았던 관계로 내가 나가서 직접 사야 했다. 그리고 야채는 하루만 둬도 시들해지니 종종 나가서 사 올 수밖에 없었다.
김치야 예전부터 여기 재료로 담가왔으니 배추김치를 다 먹은 후로 가장 많이 담가 먹은 것이 양배추 물김치와 오이김치, 그리고 한두 번 겨우 구한 레디쉬로 깍두기와 물김치를 담그고 그 후로는 씁쓸한 맛이 나는 갓김치 비슷한 맛의 근대 김치로 연명했다. 참고로 근대 김치는 볶고나 찌개를 끓이면 쓴맛이 줄어든다.
물김치는 처음 담가봐서 또 엄마 소환.
“엄마 물김치 어떻게 담가? 양배추로 할 거야.”
“양배추 살짝 절이고 물 넣고 뉴수가 조금 간은 소금으로 적당히 액젓 넣지 마.”
“응? 적당히? 액젓 안 들어가?”
“응 액젓 절대 넣지 마.”
“알았어.....”
엄마는 여전히 적당히 넣으라 신다. 그래서 예전 엄마가 물김치 담갔을 때 맛봤던 그 기억을 되살려 담갔다. 엄마의 조언을 벗 삼아 액젓은 절대 넣지 않았다. 사실 우리 집 김치는 액젓 냄새가 거의 안 나게 담그는 편이라 액젓 냄새 심한 김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물김치 달인 수준으로 누구나 극찬하던 엄마 물김치에는 액젓이 안 들어갔구나. 이제야 알았네.
쿠바에서 제일 구하기 쉬운 재료가 파다. 쭉쩡이 같이 상태가 안 좋긴 하지만 그래도 파는 쉽게 살 수 있다. 양파는 금값 수준으로 비싸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산다. 그래서 고기 먹을 때 꼭 파절이를 만들거나 반찬으로 파를 데쳐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파데침을 한 번 만들기 시작했더니 굴 속의 호랑이랑 곰이 된 것처럼 매일 파만 먹었다. 작년 5월에 우리 집에 오셨던 분이 파 묶기 신공을 보여주셨었는데 그분의 실력은 따라갈 수가 없었고 처음 몇 번 파 묶기를 시도했다가 너무 손이 많이 가기도 하고 파 묶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 성질이 나기도 해서 나중엔 먹기 좋게 잘라먹었다.
쿠바 사람들이 좋아하는 재료 중 하나가 다진 고기다. 여기서는 삐까디요라 부르는데 주로 돼지고기가 많고 간혹 소고기 다진 것도 판다. 작년에 쿠바에 장기 체류하러 왔을 때, 소시지인 줄 알고 샀다가 해동 후 중간을 떡하니 잘랐더니 누가 뭐 토해내듯이 다진 고기가 지 스스로 쭉쭉 내뱉던 때가 기억난다. 어떻게 해 먹는지 몰라 이사할 때 냉동실에 그대로 두고 나왔는데 이젠 다진 고기 요리 레시피만 여러 개.
나처럼 체류 중인 S랑 대화 중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삐까디요 줘도 안 먹어 지겨워 그만!! 그 정도로 지겹게 먹은 것이 삐까디요, 바로 다진 고기다. 두부는 없었지만 없어도 부쳐지긴 하니 동그랑땡을 자주 해 먹었고 가지와 함께 볶아 먹거나 한 번은 태국요리 팟카파오무쌉(돼지고기바질볶음)도 해 먹었다. 바질가루만 있었지만 그래도 얼추 맛은 비슷하게 나서 되려 나 스스로 놀랐었다.
쿠바에서 내 사랑 태국의 향기라니.
치킨 가슴살로 뭐하지 고민하다가 급 케이준 치킨 샐러드가 먹고 싶어서 양상추고 뭐고 없으니 쿠바 상추(한국 상추보다 성체인 데다 억센 편)와 오이, 토마토 등으로 샐러드부터 가득 채웠다. 미리 만들어둔 피클과 손님이 주고 가신 일회용 머스터드소스 등등 넣어 소스를 만들었는데 이렇게 맛있기 있기 없기?
쿠바에서 제일 싼 것이 빵, 작은 햄버거 빵 같은 것 24개가 1달러 정도 되겠다. 식빵 같이 생긴 빵은 구하기 어려워 햄버거 빵을 잘라 계란물 입혀 설탕 뿌려먹는 토스트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빵을 좀 더 특별하게 먹을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문득 계란빵이 생각나 햄버거빵 속을 파내어 계란에 양념을 넣고 전자레인지에 돌려먹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계란빵 사 먹지도 않았는데 여기선 먹고 싶어 지더라.
문득 중국 윈난 성 여행할 때 먹었던 시홍스지단미엔(토마토계란볶음면)이 생각나 만들어 먹기도 했다. 면이 있으면 국물 면요리가 되고 면이 없으면 그냥 반찬이 된다. S가 나초를 조금 나눠줬을 때는 나초에 얹어먹을 소스도 만들었다. 멕시코 칸쿤에 몇 달 살 때 종종 레스토랑에 가면 기본으로 나오던 그 작게 썰은 야채를 생각하며 만들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는 재료로 만들어 먹고살다 보니 코로나 속의 쿠바에서 맞이한 봄은 그렇게 맛있는 하루하루 속에서 지나가고 있었다.
없으면 없는대로 산 것 치고는 뭐든 없는 나라 쿠바에서 너무 잘 먹고살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