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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넘쳐야 쓰는 것인가, 아니면 길어올려 쓰는 것인가

지난 유월 십칠일 브런치에 첫 글을 쓴 뒤로 103편의 글을 쓰면서 계속해서 물었던 질문이다.


내가 글을 쓴다고 생각하지만 종종 글이 나를 쓰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언젠가 국어 교과서에서 읽은 것처럼 글은 마음에서 천천히 차 올라 숙성되어 넘쳐야 쓰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실제 브런치 글쓰기는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면서 질문은 더 깊어졌다.


스스로 찾은 대답은, 글이 저절로 넘치는 일은 드물며 길어올리는 작업을 꾸준히 하다보면 차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하고) 넘쳐서 쓸만한 글이 있다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작가(혹은 글쓰는 사람)에게 그런 일은 드문 것 같다. 오히려 매일 쓰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그동안 드러나지 않던 것이 보이고 그것이 글로 표현되어 마음에 조금씩 차게 되는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을 쓰기 위해 매일 달린다. 운동에 소질이 있거나 몸이 튼튼해서가 아니라 '그냥 달리는 것이 그에게 맞기 때문에', 그리고 '이건 그의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한다. 달리는 이유는 오직 하나, 글을 쓰기 위해서다. 그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자신의 혼돈마저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언어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과묵한 집중력이며, 좌절하는 일 없는 지속력이며, 견고하게 제도화된 의식, 그리고 그러한 자질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신체력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안다. 남이 알던 모르던 성실하게 글을 쓰는 과묵한 집중력,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거나 때론 아무것도 쓸 것이 없어도 견디어 내며 뭐라도 쓰는 지속력, 스스로만이 터득한 글을 쓰기 위한 준비와 패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신체적 능력이 중요함을 말이다. 


나는 달린다. 딱히 글을 쓰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깨어있기 위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기 위해서, 그냥 그것이 아무튼 내 인생에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달린다.


오늘 달리면서 해가 지는 가을과 만났다. 공기는 선선하고 석양은 타오르고 나는 달리고 있었다. 그 순간, 모든 걱정을 잊고 본질을 실천한다. 한 발에 한 발씩, 한 걸음에 한 숨씩 살아가는 법을 다시 연습한다. 생각은 저 혼자 멀리 뛰거나 걷거나 때론 달아나 버려도 달리는 일은 변함없다. 그저 해내야 하는 것, 감정이나 의욕이 넘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냥 꾸준히 해 내는 것이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글은 넘쳐야 쓰는 것인가, 아니면 길어올려 쓰는 것인가?


넘치는 마음은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 마음을 들여다보고 채우는 작업이 필요하다. 요리를 하기 위해서 재료를 준비하고 맛을 깊게 하는 된장을 담그고 숙성시키는 시간, 무엇보다 시간을 들여 누군가를 위해 정성을 쏟는 마음이 필요하다. 인스턴트 시대에 이런 거추장한 의식을 없애버리고 싶겠지만 그러면 남는 것은 영혼없는 말, 편의점 삼각김밥일 뿐이다. 


꾸준함과 살뜰함으로 영혼을 채우는 일, 반드시 글을 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살기 위해 필요한 일이 아닐까. 나는 달리고 어떤 이는 음악을 듣고 어떤 이는 카페로 향하겠지만 본질은 무의미한 반복에서 벗어나 좀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신선한 어떤 것을 길어올리기 위해서라는 점에서 같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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