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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정말 느린데 일주일 한달은 전광석화 같다면

나이들면 왜 시간이 빨리 갈까? 자고 일어나면 일주일, 한달이 지나가 버렸는데 오늘 하루는 지겹고 나중에 무얼 했는지 돌아봐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쯤되면 시간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군대에서 전역일을 손꼽아 기다리던 때가 생각난다. 9월 21일 만기제대일을 달력에 표시해 놓고 하루하루 지워 나가기를 2년 넘게 했는데 갈수록 시간이 더디게 갔다. 시계추에 무거운 돌덩이를 달아 놓은 듯 시간은 정말 시나브로 갔다. '머리를 박고 있어도 시간은 간다!'고 했지만 실제로 머리를 땅에 박고 있으면 시간이란 배고픈 사람 앞에 두고 밥 뜸들이는 것과 같다.


6세기 베네딕도 수도회에서부터 시간을 규율과 규칙 안에서 관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간의 낭비는 죄라 가르치며 철저한 시간엄수로 수도생활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시간이란 하루 단위로 해가 뜨고 지는 동안을 의미했다. 가톨릭 교회에는 '삼종기도'라는 전통이 있는데 하루에 세 번 종을 칠 때 바치는 기도다. 아침 6시 성당의 종이 울리면 기도를 바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낮 12시 다시 종이 울리면 기도를 바치고 점심을 먹고 쉬었고, 저녁 6시 종에 맞춰 하루를 마감하며 바치는 삼종기도는 일반인들에게 주어진 시간단위였다. 그러던 시간이 16세기부터 집과 공공장소에 시계가 들어오면서 규격화된 단위로 분절하여 측정가능한 '시계시간'으로 바뀌었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학교 교육, 시간단위 노동과 임금, 일상에서 시간엄수가 일반화되었다.


밀레의 '만종'은 '오후에 치는 종소리'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삼종기도'를 뜻한다.


하지만 시계시간은 기본적으로 허구다. 숫자로 허구화된 시계시간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다. 대신 자연의 시간, 살아있는 시간이 사라졌다. 그 증거로 그리스 사람들은 두 가지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크로노스(Chronos)는 제우스의 아버지로 농경과 계절, 시간의 신이며 물리적이고 불변적인 시간, 즉 시계시간을 뜻했다. 반면 제우스의 아들인 카이로스(Kairos)는 기회의 신, 주관적이고 감정적 시간, 시계시간으로 사라진 살아있는 시간이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카이로스는 잘 생긴 소년으로 앞머리가 아주 길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뒤는 대머리였다. 그 이유는 카이로스가 눈 앞에 있을 때 붙잡아야지 지나가고 나면 아무리 해도 잡을 수 없음을 뜻한다. 찰나의 기회, 삶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은 깨어있는 사람만이 붙잡을 수 있다.


인간 존재는 근원적으로 시간적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태어나서 죽음을 향해 가는 사이에 있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의 숙명이며, 외형적 시간인 크로노스에 갇혀 불변하는 물리적 시간을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의 운명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죽기 위해 태어난 인간에게 삶의 의미는 카이로스를 어떻게 발견하고 살아가는가에 달려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같은 것을 먹고 같은 일을 시작한다. 점심이 되면 또 무언가를 먹고 잠깐 쉰다. 오후는 졸음과 싸워가며 같은 일을 반복하다가 저녁 때가 되면 또 먹는다. 저녁에는 잠시 다른 일에 몰두하다가 잔다. 똑같은 일을 다시 반복하기 위해서.


반복, 무료함을 견디는 것, 이것이 삶인가? 반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아무 생각없이 똑같은 행위를 계속 하는 기계가 되는 것이 최선이다. 무료함은 다시 반복을 위해 술, 게임, 운동 등으로 잠시 잊는 것, 이게 우리 삶의 본질인가?


몇 년 전 비행기 탔을 때가 생각난다. 뒤에 앉은 꼬마가 '아빠, 이렇게 큰 게 정말 하늘을 날아?' (창밖을 보며) '우와, 집과 자동차가 개미만해!' 신이 나 흥분한 꼬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혼자 미소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언제부터 내가 비행기 타는 것에 익숙해졌을까, 어떻게 어린이의 설레임과 흥분을 잃어버렸을까, 세상 모든 것이 정말 당연한 것일까 하는 생각에 놀랐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하늘 나라는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무료한 곳은 아닐 것이다. 그와 달리 어린이의 흥분과 설레임, 모든 것이 제 모습대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곳이 아닐까. 그렇다면 살아있지 않은 사람이 하늘 나라에 가면 오히려 그곳이 지옥이 아닐까. 영원한 고통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반복도 같은 벌일테니. 


시간을 제대로 사는 나름의 네 가지 방법을 나누고 싶다.


첫째, 시간을 즐긴다. 지나가버릴 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끼고 즐기는 것이다. 무엇을 해도 그 순간에 머무르며 다른 시간-과거나 미래-으로 가지 않는다.


둘째, 시간을 늘린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순간은 행복하다. 그때 아이스크림을 한 입에 배어먹지 말고 천천히 핱아 먹는 것, 행복한 시간을 늘리는 방법이다. 


셋째, 시간을 만든다. 나름의 행복한 시간을 찾아 만든다. 달리기 하는 시간을 정하고, 좋아하는 영화를 찾아 보고, 음악을 듣고, 친구들과 만난 것을 먹는 시간을 만들 수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넷째, 시간을 견딘다. 결국 인간은 시간을 넘어설 수 없는 존재다. 시간을 인내하다보면 새로운 시간, 카이로스가 온다. 때를 위해 기다린다.


어린이처럼 순간을 즐기며 행복한 시간을 만들며 살고 싶다. 매순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경탄하고 즐거워하는 것, 어린이에게 삶은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발견이다. 산속 다람쥐처럼 100% 살아있는 삶, 누구나 자기 안에 있는 어린이를 깨워 살게하면 시간은 선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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