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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참회예절>

단풍이 붉게 물드는 이유는 나무가 부끄러워서입니다. 겨울이 닥치면 나뭇잎을 다 떨구어 내고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야 하는 나무는 자기의 속살, 치부, 부끄러움을 다 보여주어야 하기에 부끄러워서 붉게 물드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부끄러워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의 잘못, 이기심, 욕망 등이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을 피하고 없는 채 하지 말고 그 부끄러움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겸손하게 주님 앞에 자신을 내려 놓을 때 가을 단풍이 붉게 물들듯이 부끄럽지만 아름답게 드러날 것입니다. 다같이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강론>

제 할아버지는 인자하고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한번도 화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고 언제나 손자들을 아끼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런 할아버지를 저는 무척 좋아하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군생활 하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가족들은 할아버지와 저의 친밀한 관계를 아는 까닭에 저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제대하는 날, 저는 할아버지 집에 가서 할아버지 영정 사진을 놓고 울면서 밤을 새웠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예수님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고, 믿어본 적도 없는 할아버지는 천국에 가셨을까요? 구원받았을까요? 개신교 신자라면 당연히 할아버지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니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깨달음에 도달하기를 원하시는’(1티모 2,4) 분이시기 때문에 비록 무신론자라도 진리를 탐구하며 자기의 도덕적 양심에 요구하는 바를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만이 아시는 길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선을 긋지만 않는다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는 한계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인장을 받은 144,000명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은 이 숫자 안에 들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알면 숫자12는 완전함을 상징하며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상징하고 예수님의 열 두 제자도 같은 뜻입니다. 이같이 완전한 12에 12를 곱한 144라는 숫자에 충만함과 풍요함을 상징하는 숫자인 1000을 곱하면 144,000이 됩니다. 곧 특정인을 가리키는 숫자가 아니라 구원을 받을 의인이 아주 많다는 뜻입니다. 성경도 모르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는 사이비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왜곡하고 구원받을 사람 수를 이용해 사람들을 속입니다. 한때 신천지 신자는 모두 구원받는다고 했다가 신자수가 15만명을 넘어서자 그 가운데 구원받을 신자를 가려내기 위해 필기시험을 치는 것을 보면서 ‘구원이 입시경쟁과 다를 바 없구나.’하는 실소를 자아냈습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나의 할아버지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며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우리와 함께 살다가 세상을 떠난 훌륭한 사람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삼촌, 이웃 등 비록 성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는 않지만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그들의 삶을 기억하며 우리도 그들처럼 되고자 희망하고 갈망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냥 다 자란 성인(adult)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saint)이 될 수 있을까요? 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되는 사람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 곧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한 사람들’(묵시 7,14)입니다. 달리 말하면, 고통을 인내하는 과정을 통해 정화된 사람들입니다. 요즘 같이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에 여러가지 고통을 인내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성인이 되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이 큰 사랑 덕분에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하느님 자녀로 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때론 환난과 고통을 가져옵니다. 그럴 때 그 환난을 견디어 이겨내면 우리는 희망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 곧 성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는 자라나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찬미예수님!’하고 인사할 때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찬미합시다.’라는 뜻만이 아니라, 나에게 인사하는 사람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얼마나 잘 계신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불교에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안에 계시고, 서로가 ‘성불하십시오.’하고 인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찬미예수님!’하며 서로의 예수님께 인사하며 각자 안에 계신 예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찬미예수님!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자라나 성인이 되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성인은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하고 자비롭고 깨끗하고 평화를 이루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행복은 예수님이 누리신 행복을 닮았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에 저는 할아버지를 기억합니다. 할아버지도 저를 위해 천국에서 기도하고 계심을 저는 믿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만날 것입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제게 인사할 것입니다. ‘찬미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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