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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2

한 수도자의 이야기

2장 (Part Two)


두 번이나 수도서원을 청했으나 거절당했고, 게다가 수도원장이 제대로 준비가 될 때까지 그를 다시 수련기로 보낸 뒤에 젊은이는 크게 상심했다. 수도원장의 두 번째 거절은 그 안에 있는 불안의 소용돌이를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그는 보기에는 조용히 일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실은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 애쓰고 있었다. 그의 수련복 안에는 혼돈의 발작이 거센 물결처럼 그를 후려치고 있었다. 내면의 혼란이 거세지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 번에 한 발씩 내딛으면서 어쨌든 버티는 것 뿐이었다. 혼돈의 발작이 더해질때면 그는 간신히 숨을 들이쉬면서 이것이 불안과 공포의 마지막 엄습이기를 바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과연 누가 있을까? 수련장은 삶에 비관적이었고 그의 고해신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수도원에는 백 오십명의 수도자가 있었지만 누가 그를 도울 수 있을까? 그때 알리피우스 신부가 떠올랐다.


알리피우스 신부는 공동체에서 독불장군처럼 받아들여졌지만 한편으론 현명하게 보였다. 그는 구두 수선공으로 정원 아래에 있는 그의 작은 일터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소문에 따르면 그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에 사람들은 그를 멀리했다. 젊은이는 혼자 되내었다. '그를 만나봐야 되겠다.' 다음날 기도시간에 그는 성당에 있는 알리피우스 신부의 자리에 쪽지를 남겼다. “혹시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오후에 답장이 와 있었다. “저녁 식사 후에 내게로 오시오.” 그래서 젊은이는 저녁 식사 후에 알리피우스 신부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몰래 정원 아래로 내려갔다.


탁자에 기댄 채로 알리피우스 신부는 누군가의 구두를 고치며 앉아 있었다. 그는 돋보기 너머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앉아서 무엇이 문제인지 말해 보시오.” 젊은이는 끝이 없을 것 같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모든 삶, 진짜 수도원을 찾아 나선 일, 수도서원이 두 번이나 거절된 것 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알리피우스 신부는 구두 한 짝을 고치고 있었다. 


젊은이가 말을 마치자 알리피우스 신부가 말했다. “한가지만 묻겠소. ‘그대는 누구요?’” 

“제가 방금 전에 말씀드렸잖습니까?” 젊은이가 말했다. 

“아니요. 그대는 그대가 입고 있는 옷들에 대해서 내게 말했다오. 그대의 이름, 어디서 왔고,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어떤 것들을 배웠는지 말이오. 당신의 문제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오. 내가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리다. 당신은 하느님 광채의 한 줄기요.”


'이런 어리석은 말 같으니', 젊은이는 혼자 생각했다. 그러나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대는 하느님을 찾는다고 말했지만 빛의 줄기는 태양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태양을 찾지 않는다오. 당신은 하느님 포도밭의 가지라오. 가지는 이미 포도 줄기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포도를 찾지 않고, 파도는 이미 바다로 가득 넘치기에 바다를 찾지 않소. 그대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당신 자신에게 붙어있는 꼬리표를 믿고 있다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성인이다,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나는 벌레이며 사람이 아니다, 나는 수도자다, 나는 간호사다. 이 모든 것은 딱지들, 곧 걸치고 있는 옷과 다를 바 없다오. 이 모든 것들은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그대 자신은 아니오. 하지만 그대가 이 꼬리표를 믿기 시작하면 당신은 거짓을 믿게 되고 그것은 고통에 고통을 더하는 것이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 삶에서 주로 하는 일이지.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경력이라고 말하지만 수도자들은 이것을 성소라고 부른다오.”


“시편저자가 말하는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가 무슨 뜻인지 스스로 경험하고 깨닫기 전에 그대는 먼저 멈추고 그대가 누구인지 배워야만 한다오. 그 나머지는 다 따라오기 마련이지.” 다시 알리피우스 신부가 말했다. 

“당신의 기도에 대해서 말해보시오.” 

“저는 공동기도에 빠진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젊은이가 대답했다. 

“나는 그대가 기도를 하는가를 묻지 않았소. 나는 기도에 대해서 물었소.” 

“침묵기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말해보시오.” 

“저는 침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젊은이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대는 이미 침묵하고 있다오. 나는 어떻게 많은 소음과 혼란이 소용돌이치는지 안다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진실이지. 그러나 그대, 그대는 침묵이라오. 그대는 혼돈을 이해하고 있는 침묵이라오. 그대는 혼란을 바라보는 침묵이라오. 다시 내가 말하건데, 그대는 그대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오.”

“그러면 이 모든 혼란은 무엇입니까?” 젊은이가 물었다.

“그것은 날씨와 같은 것일 뿐이오. 말해 보시오. 그대가 침묵 가운데 앉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저는 관상에 다다를려고 노력하지만 곧잘 제 생각 속에서 길을 잃어버립니다.”


알리피우스 신부가 말했다. “그러나 침묵, 침묵과 관상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깊이있는 것이라오. 그리고 그대 머릿 속에서 계속되는 것들이 머무르는 광활한 어떤 것과 연관이 있다오. 실재의 공허함으로 가득찬 이러한 광활함이 보이는 모든 것들의 중심으로 인식될 때, 곧 심지어 내면의 혼란도 포함할 때, 이것으로 관상, 침묵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 명확해진다오.”

“저는 그것의 일부를 힐끗 보았다고 생각하지만 보통은 제 생각 속에서 길을 잃고 맙니다.” 젊은이가 고백했다.

“그런가요? 나는 그대가 하느님 광채의 한 줄기, 포도밭의 가지라고 생각했었다오. 그런데 그대는 지금 그대가 다르다고 말하고 있소. 곧 그대 스스로를 생각 속에서 잃어버린다고 말이지오. 그러나 ‘내가 생각 속에서 길을 잃다’라고 하는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은 아닌가요, 혹은 단지 잘못된 믿음에 따른 꼬리표는 아닌가요? 우리는 보통 우리가 생각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지만 보시오, 과연 그대가 그대 생각 속에서 길을 잃었단 말이요?”

“지금은 아닙니다. 하지만 돌아가서 침묵 가운데 앉아 있으려고 하면 이런 내면의 번잡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는 제 마음이 조용해야 한다는 것과 아무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알리피우스 신부가 그의 가르침을 이어갔다. “‘내 마음이 조용해야 한다’거나 ‘아무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는 이런 생각들이 오히려 이전의 생각들보다 더 소란스럽다오. 실제로 이런 종류의 생각들이 오히려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그 믿음은 더 깊은 현실로부터 당신을 멀어지게 만들지. 침묵은 자연스럽게 현존합니다. 침묵은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다오. 당신이 ‘나는 내 생각 속에서 길을 잃었다’ ‘내 마음은 침묵해야 한다’라고 생각할 때, 잠시 멈추고 물어보시오. ‘누가 길을 잃었단 말인가? 누가 조용하지 않단 말인가?’ 지금 당장 이것을 실행해 보시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젊은이는 경직되어 보였다.

알리피우스 신부가 물었다. “그대가 생각을 직접 들여다 볼 때 그대는 잃어버린 누군가를 봅니까?”

“아니요. 아무도 없습니다. 잃어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순간에는 번잡한 소리도 없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모든 상념들이 돌아옵니다.”

“맞습니다.” 알리피우스 신부가 신이 나서 말했다. “생각은 늘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각이 하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그대가 생각이나 감정을 똑바로 보면서 누가 소란인지, 누가 고통받는지 물으면, 당신은 아무도, 고통받는 어떤 이도 찾지 못할 것이오. 물론 내면의 소란은 있을 것이고 고통도 마찬가지오. 생각은 오고 갑니다. 고통, 번민, 두려움을 보지 마시오. 이런 것들은 인식의 대상들일 뿐입니다. 내가 그대에게 요구하는 것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그 인식 자체를 들여다 보는 것이오. 이것들은 당신의 주의를 십 수년간 지배해 왔소. 이제 당신의 관심이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 안에서 쉬게 하시오. 그렇소. 나는 이제 당신의 얼굴에서 마음이 침잠해가는 것을 볼 수 있소. 무엇을 보고 있는지 말해 줄 수 있소?”

“아무것도.” 젊은이가 말했다. 

“단지 거대한 없음 뿐입니다.”

“과연 당신 머릿 속에 있는 이 모든 소란과 혼돈의 실체가 무엇인지 말해 보시오?”

젊은이가 대답했다. “그것은 단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맞소,” 알리피우스 신부가 말했다. “이제 얼마나 단순한지 볼 수 있나요? 이것은 특별하거나 희귀한 것이 아니오. 이것은 당신이 아홉 시간동안 계속해서 기도를 했다거나 지난 삼 주동안 단식을 했기 때문이 아니오. 이런 수도원의 방법은 이미 다 이루었으므로 아무 소용이 없는 것들이오. 당신이 혼돈과 내면의 소음과 비판의 회오리에 갇히는 것을 볼 때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시오. ‘나는 누구인가?’ ‘누가 혼돈을 경험하고 있는가? 누가 내면의 소음을 내는가? 누가 비판을 하는가?’하고 물어보시오. 만약 당신이 생각에 갇혀 있는가를 확인해 본다면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그대가 그대의 주의를 인식의 대상에서 인식 그 자체로 옮길 때, 그곳에는 결코 한번도 상처받거나 화내거나 놀라거나 미완성인적이 없었던 어떤 조용하고 거대한 열려있음이 있을 것이오. 그것이 바로 당신이오.”




많은 밤 젊은이는 알리피우스 신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정원 아래로 내려갔다. 그것은 모두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젊은이는 정체성의 역설과 지혜 안에서 자랐고 커다란 고요가 그 안에 생겼다. 


그들의 마지막 만남에서 알리피우스 신부가 말했다. “그대는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은 다 섭렵했다오. 이제 그대에게 다른 질문 하나를 하고 싶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요?’” 


젊은이는 침묵 안에서 내면을 응시하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알리피우스 신부가 젊은이를 바라보았을 때, 신부의 얼굴이 밝아졌다. 왜냐하면 그는 젊은이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뒤로 앉아 구두를 다시 수선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젊은이에게 말했다. “잘했소. 이제 떠나시오. 수도원장이 그대에게 할 말이 있을 것이오.”


'나는 누구인가?'라는 글은 마틴 라드(Martin Laird)가 쓴 <침묵의 땅으로(Into The Silent Land)>라는 책의 후기(Epilogue)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나 자신이 누구인지, 내 생각의 정체가 무엇인지, 무엇보다 내가 찾는 예수가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한국 카르투시오 수녀원에 계신 친구 수녀님에게 편지를 받았는데, '기도가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기도하는지?' 물어 오셨다. 그래서 이 부분을 번역해서 답장으로 보내드렸다. 이제 그 열매를 여러분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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