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부수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부활유감(復活有感)

명자나무 꽃에서 찾은 부활 소식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말씀하셨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부활을 준비하는 성삼일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곧 유언으로 시작된다. 


사제의 부활피정 역시 유언장을 펼치며 시작된다. 사제는 매년 연중피정을 하면서 자신의 유언장을 읽고 다시 써야 한다. 유언장에 정해진 형식은 없지만 꼭 들어가야 하는 내용은 있다. 사제가 남기는 모든 재산은 교회에 귀속되며, 사무처장을 유언집행인으로 임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제가 소유한 재산목록을 상세히 적는데 비밀번호를 포함한 계좌번호, 자동차, 부동산 등을 명시해야 한다. 


매년 쓰는 유언장이지만 읽을 때마다 새롭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비장한 마음도 들지만 늘 제자리에 있는 것 같고 되레 열정은 식은 듯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시간이다. 한편으론 마음을 다잡는 다짐의 시간이며 죽음 너머를 생각하는 하느님의 시간이기도 하다. 



사수동에 있는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부활피정을 시작했다. 수녀원은 온갖 나무와 꽃들로 인해 벌써 부활이 온 듯 했다. 흐드러진 벚꽃은 반가웠으며 나무마다 돋아난 연두색 새싹은 사랑스러웠다. 무엇보다 수녀원에 지천으로 널린 연산홍은 그 특유의 화려한 붉음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수녀원 뒷동산을 오르는 길가에 정예병처럼 도열한 연산홍은 손님을 맞이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수녀원을 며칠 거닐면서 천천히 매혹된 꽃이 있었는데 바로 명자나무(산당화)였다. 진초록 잎 뒤에 수줍은 듯 숨은 꽃, 가까이 다가가 눈을 줄 때에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명자나무 꽃은 그냥 아름다운 붉은 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칠 것 같은 붉은 색, 그래서 명자나무는 집안에 심지 않았다고 한다. 과년한 딸이 명자나무 꽃을 보고 있으면 바람이 났으니까.


부활은 명자나무 붉은 꽃이다. 늘 거기 있었지만 어느날 눈길이 닿자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 일상을 위에서 아래로 뒤집어 온통 흔들어 놓는 것(upside down),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다시 보고 싶어 못 배기게 하는 것이다. 수녀원 묘지로 오르내리는 길에 핀 명자나무 붉은 꽃은 그래서 더 반가웠다.



부활은 아래에서 위로 뒤집어 온통 흔들어 놓는 것(downside up)이기도 하다. 하느님이 사람이 된 성탄절이 위에서 아래로 upside down이라면, 부활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아래에서 위로 downside up이다. 그래서 강생의 신비는 부활로 완성된다. 내려온 것이 있으면 올라가는 것이 있다.


친구 수녀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고통 속에 있지 않을 때에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아래에서 위로 바라보았는데 내가 극심한 고통 속에 머물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자리에서 예수님과 같이 아래를 보고 있었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십자가의 주님을 타자가 아니라 나의 자아로 받아들이는 순간 나를 기꺼이 위로 내어놓을 수 있는 downside up이 시작된다. 미미한 지상의 인간이 하늘을 바라보고 그분처럼 되리라고 희망을 품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 길에서 명자나무 붉은 꽃을 보면 선홍색 주님의 피가 떠오르지만 마냥 슬프지 않고 가슴은 되레 뛰고, 땅에 흩어진 꽃잎은 죽음이 아니라 다음 생을 위한 부활의 찬가로 듣게 된다. 부활절 아침 명자나무 붉은 꽃이 벌써 아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출근하는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