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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에 들지 말게 하소서

대학교수의 첫 시험

내가 다닌 대학생활을 햇수로 따져보니 일반대학, 신학대학, 대학원을 합해서 14년이다. 그 기간동안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28번씩 쳤고, 보통 한 학기에 7과목을 수강했으니 적어도 400여번의 시험을 친 셈이다. 그렇지만 시험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


시험을 앞두고는 늘 긴장되고 부족한 것 같았고, 시험을 치고 난 뒤에는 개운하지 않았다. 조금 나아진 점이 있다면 이왕 쳐야 할 시험이라면 열심히 준비하고 최선을 다해 시험을 치는 것이다. 그리고는 결과에 관계없이 시험을 끝낸 것을 기뻐하기로 마음 먹은 정도다.


대학 중간고사 기간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교수 신부로 첫 시험을 낸다. 14년 동안 시험지를 받고 답안지를 작성하던 내가 시험 문제를 내고 시험을 치게 만든다. 학생에서 교수로 계급이동을 했고, 원치 않는 것을 하게 만드는 권력을 가졌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교수로 시험을 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시험지를 받아든 학생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한숨을 쉬거나 슬픈 표정을 지을 수도 있을테고, 화를 내며 일어나 욕을 하면서 교수의 얼굴을 후려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한다.


시험을 치는 이유는 배운 것을 돌아보고 다시 새기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시험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적을 매기기 위함이다. 평가를 해야 하는 교수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시험을 통한 변별력이 필요하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겠지만 시험결과는 성적순이다.


시험을 꼭 쳐야만 할까? 학생이나 선생 모두에게 곤혹스러운 이 시간이 꼭 필요할까?


누군가는 시험없는 학생이라면 평생을 하고 싶을만큼 좋다고 한다. 마치 강론없는 본당신부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시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학을 졸업해 취업을 하면 승진시험을 쳐야 하고, 아이를 좋은 유치원에 보내려 하면 시험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중에는 자녀가 치르는 시험의 무게를 짊어지기도 해야 한다.


다들 시험을 너무 잘 치면 어떻게 할까, 마찬가지로 너무 못 치면? 이렇든 저렇든 시험은 깔끔할 수 없다. 당하는 사람이나 그렇게 만드는 사람 모두 시험의 무게를 느낄 수 밖에 없다. 큰 마상(마음의 상처)없이 빨리 끝내는 것이 최선이다.


훌륭한 시험이 있을까 감히 물어본다. 적어도 학생 입장에서는 배운 것을 돌아보고 시험을 친 뒤에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교수 입장에서는 학생들을 괴롭히기 보다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시험을 만들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모르겠다. 그저 어서 시험이 끝나길 바랄 뿐이다.(학생은 모르겠지만 시험이 끝나면 시험 평가라는 교수의 진짜 시험이 시작된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평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교수도 학생도 배움이라는 여정에서 자신만의 십자가를 져야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간다. 시험이 끝나는 날은 언젠가 올 것이다. 그때는 삶이 어느새 막바지에 접어든 때이며 마지막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 자신의 삶으로 죽음 너머의 부활을 준비하는 시험. 그러니 시험을 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하소서.'


나는 기도한다. 


시험을 위한 시험, 시험뿐인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시험다운 시험, 더 나아가 시험 너머의 시험을 준비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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