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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성령

성령강림대축일

옛날에는 국어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한국말처럼 어려운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각자 다르게, 그것도 완전히 다르게 이해하는 것을 보며 우리나라 말을 제대로 쓰는 것이 정말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인은 그 극단을 보여줍니다. 어떤 유력한 정치인이 말을 하면 그 말을 정말 다르게 해석하고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처음에는 당황하고 실망스럽다가 그 다음에는 화가 나지만 결국에는 허탈해 질 뿐입니다. 같은 말을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 분열과 시기만이 남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그 반대입니다.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지만 모두 같은 말로 알아듣습니다. 오늘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다른 언어로 말했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세상의 이치는 같은 언어를 자기 위치와 입장에서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성령이 필요합니다. 그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한가지 뿐입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왜냐하면 그도 은사와 직분을 받고 활동을 하는 다른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필요없다.’하고 말할 수 없고, 공동선을 위해 손은 발을, 눈은 코를, 귀는 입을 받아들이고 용서해야 합니다. 나도 동료를 용서하고, 이웃을, 가족을, 나 자신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느님까지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숨으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예수님도 살아서 사람들로부터 다르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먹보에 술꾼, 세리와 죄인의 친구, 마귀 우두머리 등 수없이 오해받고 비난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 생명의 본질인 숨은 바로 용서의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용서때문에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매일 우리 역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못 나갑니다. 평화는 용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만일 우리가 평화롭지 못하다면 용서하지 않은 이유 때문입니다. 온 누리의 얼굴을 새롭게 하는 성령은 결국 우리 마음안에서 지금 시작하는 용서에서 비롯됩니다. 


성령강림날인 오늘, 그동안 같은 언어를 다르게 받아들이고, 다른 지체를 한 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용서를 통한 평화를 추구하지 않았다면, 더 절실히 성령을 청해야 합니다.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 여러 은사와 직분, 활동 가운데에서 공동선을 위한 같은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령은 용서입니다. 


“오소서 성령님…허물들은 씻어주고 메마른땅 물주시고 병든것을 고치소서. 굳은마음 풀어주고 차디찬맘 데우시고 빗나간길 바루소서. 성령님을 굳게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 성령칠은 베푸소서.”(성령송가 중에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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