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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두려움 없이,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펜데믹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

조르조 아감벤의 <얼굴 없는 인간>을 읽었다.


얼굴이야말로 인간성의 공간이자 정치적 장치인데 펜데믹으로 인해 우리는 얼굴에 대한 권리를 단념하고, 마스크로 덮고, 시민의 얼굴을 가리기로 결정한 국가는 정치를 없애버렸다.


코로나19 전염병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태리에 사는 조르조 아감벤은 우리가 살아가는 펜데믹 시대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진단한다. 


아감벤은 이야기한다.


코로나19는 '보건 공포'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독재, 봉쇄, 격리, 통제를 가능하게 했다고. 


펜데믹으로 인해 이태리에서 행해졌던 통행금지와 봉쇄, 그리고 70대 이상 나이든 시민의 이동금지는 1, 2차 세계대전 때에도 없었던, 헌법에 보장된 인권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의료 종교'를 숭배하면서 바이러스라는 사악한 신과 전쟁 중인데 '바이오 보안(Bio Security)'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의 모든 정치 활동과 사회관계는 중단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접촉은 곧 전염가능성으로 여겨지며 접촉이 없어진 사이를 디지털 기술이 메꾸려 하고 있다. 전염이 의심되는 모든 곳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서 물리적 인간관계가 디지털 기술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교육 현장의 온라인 교육이 바로 그 예다. 


이런 펜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다시,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접촉 없는 사랑, 얼굴 없는 사회가 과연 가능할까?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서도 인간성을 지킬 수 있을까? 이런 것을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건 공포로 인해 이 모든 뉴노멀을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이고 정치와 권력에 순응하고 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아감벤의 통찰은 아직이다.


"사람들이 어떤 보장도 없는 전례 없는 제재와 제약을 받아들인 이유는 펜데믹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익숙했던 세상이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고 비인간적이었다...모든 측면에서 예전 같은 삶이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은 어떻게든 예고돼 있었다...보건이 구원을, 생물학적 생명이 영생을 대체하였으며 오랫동안 세상의 요구에 타협하는데 익숙해진 교회는 이러한 변화에 대체로 동의하였다." 


나 또한 아감벤의 의견에 적극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마스크 착용과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것을 보면서 극단적 개인주의를 우려하며 사람들이 포퓰리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걱정하는 바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보건 공포의 시대에도 반드시 지켜야 할 인간 존엄에 대한 가치, 언론과 정치 권력에 대한 민감함,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과 비전일 것이다. 


우리가 그저 두려움 속에서 편향화된 언론에서 외치는 정치 권력의 목소리만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또 다른 의미에서 전체주의 시대를 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주인을 기다리는 충실한 종처럼, 깨어있는 개인이 되는 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인간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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