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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렛에서 새해 첫 아침

올 한해 어디서 무얼할까 걱정하지 말기!

영하 5도에 옷을 여미며 주차장으로 내려가 모닝의 본넷트를 열고 엔진오일을 채운다. 부르릉, 시동! 시동 하나는 역시 잘 걸린다 ㅋ. 모닝 출발!


나자렛집으로 가는 길이다. 2000년 하양신학교가 처음 생기고 스스로 봉사활동을 찾아 나선 신학생들 가운데 나를 비롯한 신학생들은 부랑인 시설인 영천 나자렛집으로 가기 시작했다. 우리를 스스로 '나자레누스(Nazarenus)'라 부르며, 이년동안 매주 봉사활동으로 방문했었다. 성탄을 맞아 나자렛집 가족잔치도 처음으로 열었었다.


영천 나자렛집에서 2001년


한번은 이십년 전 도로가 지금처럼 있기 전에 신학생 몇 명이서 자전거를 타고 나자렛집으로 간 적이 있었다. 가긴 갔는데 진이 다 빠져 돌아올 엄두를 못내던 우리를 불쌍히 여긴 원장수녀님께서 1톤 트럭 뒤에 우리를 싣고 데려다 준 적이 있었던 나자렛집 가는 길을 오늘 가고 있다.


대구가톨릭대학교에 와서 가장 먼저 부탁받은 일이 나자렛집에서 한달에 한번 주일 미사를 봉헌하는 일이었다. 이십년전 신학생이 사제가 되어 다시 나자렛집에 가면서 운명을 예감했다.


나자렛집 가족들을 만났는데 반가운 얼굴들이 그대로 있었다. 여전히 목청껏 노래하고 대답하며 씩씩하게 웃는 모습도 변함없었다. 나이는 들어도 어린이같은 천진난만함이 그대로 있었다. 손가락이 없어도 팔이 없어도 정신이 온전치 못해도 여전히 멋진 분들이다.



오늘은 새해 첫날, 요셉, 마리아, 예수의 집이 있는 나자렛으로 간다.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사제를 반가이 맞이하는 이들과 인사를 나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호경을 긋고 가족들의 얼굴을 보니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빌어먹고 사는 사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복을 청하며 이들을 강복한다. 서로 축복하며 새해 인사로 사제는 제대에서, 가족들은 자리에서 세배를 한다. 당연히 세뱃돈을 줘야 한다. 준비한 천원 신권을 한사람씩 세뱃돈으로 준다. 직원들, 수녀님들까지 나온다. 역시 (잘 쓰기만 하면) 돈이 최고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음을 깨닫는다. 세상 누구보다 사제를 아끼고 귀하게 받아주는 가족들을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음이 은혜롭다. 마음껏 강복하고 축복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새해 들어 큰 것을 꿈꾸지 않는다. 그저 내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더 소중히 여기고 더 자주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면 충분할 것이다.


새해 들어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내 자리에서 사제로 기도하고 축복하고 강복하는 일을 하면 충분할 것이다.


새해 첫날, 나는 꽃자리에 서서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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