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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암시민 살아진다

내 안에 태어난 성탄절 말씀

제주도에서 제주 사람에게 들은 말 가운데 가장 가슴에 와 닿은 말이 있다.


너무 가난한 까닭에 남편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하고 있는 한 여인이 해방 후 다가온 어려움 속에서 4.3으로 하나뿐인 사위를 잃었다. 어머니는 망연자실한 딸에게 한마디 한다.


"살암시민 살아진다."


지난 한해를 돌아보니 우리 삶 모두가 이렇지 않았을까 싶다.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마스크를 매일 끼고 어디를 들어가든 이름과 전화번호를 써야하는 불편함과 매일 확진자 숫자를 보며 마음을 졸이는 일만이 아니었다.


학교 못가는 자녀를 걱정하는 부모, 직장이 불안한 가장, 취업이 너무나 힘든 취업준비생, 작은 프랜차이즈 커피집을 운영하는 자영업자, 나이드신 부모님, 신자들이 없는 성당과 학교를 그만두는 학생을 지켜봐야 하는 사제가 모두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삶을 살암시민 하고자 애썼다.


다들 정말 고생 많았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을테고, 약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실망적일 때도 있었을테고, 도무지 앞이 안보여 불안할 때도 있었을테고, 끊이지 않는 걱정 때문에 힘들었을 때도 있었을텐데 그래도 살암시민 살아와서 우리가 이렇게 한해의 끝자락에 와 있다.


"괜찮다, 괜찮다."


성탄절에 내 안에 태어나신 예수님(말씀)이시다. 어떻게든 해 볼려고 애쓰지만 안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모든 상황에서 주님은 '그렇게 너무 힘들어하지 말렴. 괜찮다. 괜찮아.'하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잘 나갈 때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괜찮다'는 말이 심장에 와 닿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허영심이 꺾여 거품을 걷어지고 이제 살고 죽는 본질적인 삶 앞에 선 자신을 볼 수 있어서가 아닐까.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서는 모든 일이 다 사소해지는 것처럼, 우리는 사는 일 그 자체, 혹은 겨우 살아내는 일이 무얼 뜻하는지 이제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그동안 남들처럼,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생각없이 아무렇게나 사는대로 살았다면 이제는 살암시민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다가오는 새해도 그렇게 살암시민 살아야 하겠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새롭게 할거다. 못내 사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고, 시련이 오겠지만 피하지 않고, 미움이 일어나겠지만 사랑할거다. 살암시민 못할 것이 없다!


사는 일은 원래 힘든 것이다. 태어날 때 우는 아이는 삶이란 본래 환희보다는 슬픔에 가까운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 아름답도다" (이중섭 '소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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