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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결심이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

카카오톡과 같은 소셜 미디어는 우리의 삶을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순식간에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필요한 정보를 쉽게 공유하는 아주 멋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 저는 이런 소셜 미디어가 인간의 감정과 느낌에 너무 무심해서 무참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제게 일어났습니다.


지난 4월 5일 아침 저는 여느때처럼 아침미사를 봉헌하고 식사 후 동료신부들과 가벼운 산책을 한 뒤에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새벽 4시 20분에 아는 분이 보낸 카톡 메시지가 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뭐지’하고 메시지를 열었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놀랍고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군위성당 주임신부로 있을 때 처음 뵙는 젊은 자매님이 성당에 오셨습니다. 이사 오셨다며 인사를 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지만 슬픔과 걱정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곧 아들과 함께 성당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아버지라면서 한 남자를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순수하고 멋진 형제님이었습니다. 그렇게 세 사람은 한 가족으로 성당에 나오기 시작했고 형제님은 교리반에 등록하여 아들과 같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나름의 아픔이 있는 부부가 성가정을 이루어가는 것을 보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었습니다.


군위성당에 있는 동안 형제님과 저는 많은 일을 함께 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형제와 같이 군위성당 축구팀을 만들어 군수기 축구대회에 출전하고, 자전거를 타고 산에도 오르고, 하프 마라톤도 같이 뛰었습니다. 형제는 여름에 엄청 더운 사제관에서 고생하는 저를 보고는 직접 그늘막을 만들어 와서 사제관 지붕을 덮어 주었습니다. 한때 사제관에 있었던 별님이를 보러 아버지와 아들이 자주 성당에 놀러올 때는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몇 년 뒤 저는 군위성당을 떠났지만 그 형제는 대구가톨릭대학교 마라톤 대회에도 참여하여 같이 뛰었고 가정일이나 사업에 관한 일이 있을 때마다 제게 상의하곤 했습니다. 친구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날 새벽 제게 온 카톡 메시지는 그 형제가 전날 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자매님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제대로 말도 못하고 전화기 너머 울고 있는 자매의 소리를 듣다가 어줍잖은 위로 몇 마디를 했을 뿐이었습니다.  


사람은 몸과 마음이 하나입니다. 형제의 갑작스런 죽음은 제게 심리적 충격 이상으로 다가왔습니다. 몸도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긴 하루의 수업을 겨우 마칠때 쯤 코로나에 확진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소와는 다른 목아픔, 기침, 근육통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형제의 입관이 하루 늦춰져 다음날 오후 1시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보건소에 가서 코로나 자가검사를 하면 확진이 될 것이고 그것은 바로 격리를 뜻했기에 참기로 했습니다.


다음날 수업을 마치고 서둘러 군위로 가는 길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로서 봄이 가득한 아름다운 길이었지만 너무 아름다워 한없이 서글펐습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마자 그 아들이 달려와 안겼습니다. 그리고 그 자매와 군위성당 식구들, 형제의 가족들, 모두가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연도를 바치고 입관예절을 하러 시신보관실에 들어갔을 때부터는 울었던 기억 뿐입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저도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울다가 짧은 인사만 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고 격리되었습니다.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 충격과 슬픔, 코로나 확진과 격리가 한꺼번에 들이닥쳤습니다. 아끼는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죽음, 상실, 상처가 되어 한꺼번에 제게 덤벼들었습니다. 거기다가 격리가 가져온 갇혀있음, 소외, 무기력, 공허는 제게 예수님께서 겪고 계신 십자가 고통, 이어진 죽음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부활은 무엇입니까? 봄과 함께 때가 되면 자동적으로 오는 축하할만한 일인가요? 다들 행복해하는 분위기에 나도 젖어들만한, 그래서 잠시나마 걱정과 슬픔을 잊을 수 있는 시기인가요?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진정으로 믿고 고백한다면, 부활은 그저 좋은 분위기, 살짝 들뜬 기분만은 아닐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믿는다면 그 다음 질문은 과연 부활이 내게 무슨 의미인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나의 부활 없는 부활은 마치 봄 없는 여름을 맞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친구의 죽음으로 상실과 공허 속에서 격리하는 동안 유혹을 많이 받았습니다. 슬픔에 머무르며 세상과 하느님을 욕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유혹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어둠 속에 머무르며 무덤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원하면 원하는만큼 그 속에 스스로를 가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저와 함께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결심입니다. 죽지 않고 살아보겠다는 결심입니다. 그제서야 부활미사 시편의 말씀이 와 닿았습니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놀라우신 일을 선포하고자”(시편 118,17).


사랑한다는 말은 ‘너는 죽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형제는 죽었지만 부활을 통해 ‘너는 죽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저의 기억 속에 살아있습니다. 다만 예전과 다른 형태로 저와 함께 있기에 더 이상 그가 죽었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가까이 언제나 살아있습니다.


죽지 않겠다고, 살아야 하겠다고 결심한 순간, 그제서야 부활이 뭔지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 혹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부활하겠다고 결심한 순간 나의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누군가를 잊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것, 그의 삶을 제가 충실히 이어서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을 살아서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부활은 자비입니다. 자비없이 왜 누군가를 위해 죽겠습니까? 사랑없이 왜 부활하겠습니까? 적어도 그 자비를 알아듣고 조금이라도 실천할 수 있기를 결심하는 것, 그것이 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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