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부수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은은한 아카시아 꽃향기처럼

사제서품 15주년 기념 편지

오월 햇살 아래 선물같은 아카시아 꽃향기를 맡으며 사랑하는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5월 12일 오늘로 사제 서품 15주년이 되었습니다. 작년 이맘때 오월의 신부로 쓴 결혼기념일 편지를 읽어 보니 감사하면서도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말은 늘 행동보다 앞서고 글도 마음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해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스러운 일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기뻤던 적도 있었지만 슬펐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 시간을 통해 깨닫는 것은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나는 삶에 속해 있고 자주 삶은 나에게 준엄한 명령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때론 두렵고 피하고 싶은 것도 말입니다.


최근에 롯데 야구선수 이대호가 저보다 한참 어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그가 나보다 나이가 많을거라 생각했는지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깨달음은 제가 서 있는 자리의 무게를 실감하게 만들었습니다. 거기다가 예전에 하늘같이 보이던 선배 사제들이 지금의 저보다 한참 어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게 주어진 시간에 걸맞는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결심을 하고 살았습니다. 결심은 대부분 차갑고 비장한 것으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또한 지키지 못한 결심들, 외면한 결심들이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으니 이제 결심은 그만하고 그 자리를 사랑의 마음으로 채우고 싶습니다. 


이해와 위로, 따뜻한 눈이 저 뿐만 아니라 제가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보이도록, 사랑이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고 싶습니다. 


혼자 앞서 걸어가지 않고 같이 발 맞추어 가는 사람, 매일 볼 수는 없지만 기다려지는 사람, 자신의 자리에서 그만의 몫을 충실히 살아내는 사람, 적어도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저를 지켜주고 일으켜주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 그대와 신앙공동체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기에 그대는 제게 무척 소중한 사람입니다. 제 나름의 힘을 다해 그대와 신앙공동체를 지키고 헌신하며 살고 싶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은은한 아카시아 꽃향기처럼 말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30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