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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많지 않다

아주 먼 곳에서 온 편지

반가운 편지가 한 통 왔다.


세상에서 가장 엄격한 수도회, 한번도 개혁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던 가톨릭 교회의 심장과 같은 카르투시오 수녀회에 있는 친구로부터 온 편지다.


편지를 받고 보니 세상에서 정신없이 사느라 안부조차 오래 묻지 못한 무심함이 부끄러웠다.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앞만 보고 날아가 목표를 맞추는 인생 뒤에는 과연 무엇이 남을까? 용서하지 못했음에 대한 후회와 더 사랑하지 못했음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눈물이겠지. 바보!


수녀님은 독수처 정원에 심은 모종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 한다. 혼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들, 숨을 내쉬고 있는 생명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경이로움을 보며, 밀려드는 불안감들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비난하고 미워했던 것들이 다 부질없이 여겨지고, 수도자이지만 또한 나약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듣게 되는 가족의 마음 아픈 소식들에 담대해진 느낌들, 여태 놓지 못한 것들을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들,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들이 많이 든다고 적고 있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말을 두 번이나 쓴 구절에 오래 머무른다. 


그렇다. 시간이 별로 없다. 내일이 오늘 같으리라는 기대는 차치하고서라도 우연히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볼 때 시간은 그리 관대하지 않음을 바로 느낄 수 있다.


매일 주어지는 시간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제 한 목숨 안타까워 어쩌지 못하는 우리에게 시간이 '이제 되갚을 때가 되었다'하고 언제 청구서를 내밀지 모른다. 불안하다.


그러나 수녀님은 이런 불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전 생애도 하느님과 일치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했지요."라며 많지 않은 시간은 두려운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라고 위로한다.


산골짜기 하늘이 요사이 계속 얼마나 깨끗한지, 이것이 세상과 동떨어진 풍경이 아니라 세상의 한 평범한 풍경이면 좋을텐데...하는 수녀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편지를 받고서, 늦은 오후에는 밭에 나가 아무렇게나 자란 감자의 가지치기를 하며 시간을 솎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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