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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산티아고

천하유람기 1편

[어느날 문득]


삶은 여행이다. 누구도 원해서 태어난 적이 없는 것처럼, 인생이라는 낯선 곳에 던져져 영문도 모른채 걷다가 길동무도 만나고 사랑에도 빠져 영원히 머무를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지만 언젠가 떠나야 한다는 강박을 떨쳐내는 못하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일까, 떠나는 일은 삶에서 중요하다. 매몰되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일상에서 떠나봐야 자신이 누구인지,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는지 반문할 수 있다.


나도 그랬다. 내가 하는 일과 내 마음이 평행선을 달리고, 자유롭게 산티아고로 떠나는 친구가 너무 부러워질때쯤 떠나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리고 그 길을 '나의 산티아고'라고 이름을 붙힌 이유는 어쨌든 긴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2021년 6월 말 어느 새벽, 바이크 프라이데이(바프)를 타고 금호강으로 나섰다.



[마침내]


새벽 3시에 일어났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출발하는데 벌써 4시였다. '동해안 자전거길 강원구간' 시작점인 삼척시 임원 인증센터에 도착하니 6시 50분. 바로 출발했다. 


마침내 자전거 국토종주에서 남은 마지막 두 구간 중 부담스러웠던 길을 나선 것이다. 242km의 동해안 강원구간 완주는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가족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내가 임원에서 출발하면 나중에 형과 형수가 와서 차를 픽업해서 그 다음날 종착지인 통일전망대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른쪽에 동해바다를, 왼쪽에 설악산을 두고 달리면서 자주 통일전망대에서 내려오는 라이더들을 만났다. 나는 거꾸로 오르는 저 힘찬 연어처럼 올라가는 길이 좋았다. 풍경도 좋았고 자전거 도로도 더 잘 정비가 되어 있었지만 무엇보다 종착지에서 놀라운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통일전망대에서 멀지 않은 금강산 콘도에 해수사우나가 있다.)


망상해변, 정동진을 지나면서 동해바다에 뛰어들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젊은 서퍼들로 가득찬 양양 바다를 지날 때에는 살짝 부러웠다.(다음날 그들 중 몇몇이 낙뢰에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강릉 경포해변에 도착하니 30년전 추억이 떠올랐다. 1993년 입대 영장을 받고는 무작정 친구 둘과 함께 바다를 보겠다고 경포대로 떠났던 적이 있었다. 6월 한낮에 산행 배낭을 지고 자전거도 변변치 않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경포대에 도착해 그렇게 바다를 벗삼아 소주를 마시고 해변에서 잠들었었다. 오랜 친구를 환영하듯 경포대는 활짝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1993년 경포대 가는 길 & 2023년 경포대에서


첫날 목적지인 주문진이 가까워질 무렵,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가 나타났다. 드라마를 보지 않는 나에게 환상과 사랑, 음악과 이미지로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도깨비는 '쓸쓸하고 찬란하神',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느낌이 나름 어울린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덕분에 삶이란 '쓸쓸하지만 찬란한' 것이라 믿어온 내가 '쓸쓸하고 찬란한' 삶을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이란 자주 쓸쓸하고 종종 찬란한 그런 것!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영진해변 방사제로 내려갔다.


주문진 도깨비 촬영지에서


도깨비와 사제,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뭔가 연결되는 이 느낌, 귀신(神)과 귀신 아버지(神父). 나에게도 지은탁이 있는가, 나는 누구에게 도깨비가 되어주는가 묻고 싶었다.



[도로보다 길]


신영복 선생은 말했다. 

도로는 직선이기를 원하고 고속이기를 원합니다. 길은 곡선이기를 원하고 더디기를 원합니다. 도로는 속도와 효율성이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이며 길은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경작되는 인간의 원리입니다. 도로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이라면 길은 자기 자신이 목표입니다. 우리의 삶은 다른 어떤 가치의 하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직선을 달리고 있지만 동물들은 맹수에게 쫓길 때가 아니면 결코 직선으로 달리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아름다운 길이어야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보람찬 시간이어야 합니다.


내게 국토종주 자전거길은 곡선으로 더디지만 아름답고 즐거운 길이다. 페달 하나하나가 보람찬 시간이다.


지난 2년동안 우리나라의 많은 곳을 달렸다. 곡선인 강을 따라 산을 벗삼아 흐르며, 천하를 유람하던 선비의 마음을 조금은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감히 '천하유람기'라는 말을 붙혔다. 


우리나라의 정동진과 정서진, 남도, 섬진강과 영산강, 금강, 낙동강, 한강을 바프와 유람한 길을 돌아보니 2,000킬로미터에 달한다. 그 길은 단순히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에서, 때론 다리를 건너고 숲속을 지나며 여러 느낌을 가져왔다.


남한강 옛 철길 굴을 여러개 통과하면서 느낀 서늘함, 담양 대나무길에서 느낀 청량함, 제주도 협재를 지나며 만난 바람의 상쾌함, 이 모든 느낌은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이었다. 여행의 온도, 그날의 분위기, 내 몸의 상태, 감정의 기복은 고스란히 내 안에 담아둔다.


섬진강 새벽길을 달리며 만난 이십대 여인의 세련되고 빼어난 아름다움을 잊지 못한다. 길에서 길을 묻고 길을 만나고 길을 사랑하게 되었다. 


서두를 필요없이 그저 나의 속도로 길을 누리는 시간, 자전거 국토종주 길이다.


천하유람 중에 만난 길


이제 마지막 북한강으로 나설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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