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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이냐 탈략이냐의 문제

약사 국시 100일 기원미사

(신학교 입학하기 전에) 육군 현역으로 제대하고 복학을 준비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습니다. 


군생활 26개월 2일동안 매일 밤마다 근무 서면서 꿈꿔왔던 제대 후 삶이 생각한대로 흘러가지 않아 당황스러웠습니다. 결국 어떤 사건을 계기로 가족에게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떠났습니다. 스물 셋 나이에 가출을 한 셈입니다(그것은 20세기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지리산 산청에서 방위 복무를 하고 있던 학생회장 선배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낮에는 벼베기를 도와주고 밤에는 선배와 소주를 마셨습니다. 


"선배, 사랑이냐 혁명이냐, 이게 문제입니다!"


술에 취해서 떠들어대는 후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는 소주만 마셨습니다. 며칠 후 추수가 끝나자 쌀을 얻어 지리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밤마다 혼자서 소주를 마시며 같은 질문을 했고 취했습니다.


어느날 넓은 바위에 올랐는데 스님 두 분이 사과를 드시고 계셨습니다. 마침 목이 몹시 말랐던터였는데 한분이 사과 한조각을 나눠주셨습니다. 꿀맛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장터목 산장에 올라 저녁식사를 준비하며 라디오를 듣고 있었는데 안치환의 신곡이 흘러나왔습니다. 민중가요 가수로 혁명과 투쟁을 외치며 노래하던 그의 첫 발라드 곡(곡명은 '내가 만일')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녹아들면서 노래를 음미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지리산을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합격 아니면 탈락이고, 성공 아니면 실패라고 말합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사랑이냐 혁명이냐 둘 중의 하나를 고민했었으니까요.


하지만 살면서 보니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이 저것이기도 했습니다. 성공 아니면 실패라고 했는데 성공했지만 실패한 경우, 실패했지만 성공한 경우도 보았습니다. 내가 맞으면 상대는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둘 다 틀린 경우도 보았고, 자주 나도 맞고 너도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의 덫에 갇혀 잘못된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판단하고 심지어는 자신을 몰아붙혔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가르치시는 말씀(마태 5,1-12 산상설교)을 깨닫는데 참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모든 것에서 성공해 부유하고자 했던 마음, 나를 드러내고 나의 기쁨을 찾던 마음, 항상 자신을 중심에 두고 타인과 세상에 무관심했던 마음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기꺼이 가난을 선택하고 함께 슬퍼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정의와 평화를 위해 자신을 내놓으며 심지어 박해도 감수하는 마음이 제 안에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이냐 혁명이냐, 합격이냐 탈락이냐,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라 둘 다 이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합니다. 시험에는 합격해도 그 과정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면 탈락이 아닐까요? 성공에만 집착해서 동료를 없신여기고 배신한다면 실패가 아닐까요? 혹은 탈락과 실패를 통해서 더 중요한 것을 배운다면 어떻습니까!


이십년도 더 지난 어느날, 사랑이냐 혁명이냐를 묻던 한 사내를 만났습니다. 찌질하게 진보가 아니면 보수, 내편이 아니면 남, 성공이 아니면 실패라고 말하던 그 젊은이는 그동안 많이 부딪치고 깍여 한가지를 깨달았습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사랑도 혁명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랑의 혁명'을 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혁명이 아닌 사랑을 거부하며 나름의 투쟁을 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 옛날 안치환의 노래를 듣고 지리산을 내려오게 된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앞에는 100일의 시간이 있습니다. 쑥과 마늘로 곰이 사람이 될 수 있을만큼 긴 시간입니다. 잘 견뎌내십시오. 


견디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화생방 훈련을 받을 때입니다. CS 가스가 가득찬 방에 들어가 얼차려를 받다가 조교의 지시로 방독면을 벗어야 했습니다. 


방독면을 벗자 죽을 것 같았습니다. 참을려고 버틸려고 해도 도무지 안되었습니다. 아무리해도 안될 것 같은 순간, 옆을 보니 동료가 있었습니다. 그는 눈물 콧물 다 쏟아내며 더 죽을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웃기기도 하면서 그제서야 나만 힘든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공부하십시오. 그러다가 힘들면 옆에 있는 동료를 조용히 살펴보십시오. 이것이 100일을 견디는 방법입니다. 


무엇보다 100일동안 합격만을 성공만을 바라는 마음을 들여다보십시오. 삶에서는 이것도 있지만 저것도 있음을 깨달으십시오. 그러면 한결 힘이 될 것입니다. 어떤 결과에도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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