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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면을 세우다

새로 배우는 걷는 법

지난 겨울 강원도로 2박 3일 걷기를 배우러 떠났다. 언젠가 사람들이 산티아고로 떠나기 전에 강원도에 가서 걷기를 배운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걷기의 3세대 선생님이라 불릴만한 분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지난 여름 탈장수술을 했다는 말을 했더니 '그럴만하다'고 하셨다. 


그럴만하다고? 내 속사정을 어떻게 그리 잘 아실까, 나는 너무 열심히 뛰어서 그랬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분은 그림을 하나 그려주셨다.

인간은 지구 위에서 중력을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인간이 직립보행을 하면서 진화한 결과, 몸은 지구의 중력을 수직으로 받을 때 가장 안정감 있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런데 앉아서 컴퓨터를 하거나 핸드폰을 장시간 사용하면서 인간의 머리는 점점 몸 앞으로 나아가 거북목이 되었다.


나의 경우는 오랜 달리기에서 추진력을 얻기 위해 머리를 몸 앞으로 숙이며 달렸기 때문에 일자목이 되었고 그에 따라 어깨가 굽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처음 보았을 때 나의 자세가 흐트러졌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셨다.


그때 나는 쭈쭈바를 생각했다. 똑바로 서 있어야 할 몸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머리가 앞으로 쏠리면서 중력을 두 배로 받게 되어 몸에서 가장 약한 옆구리가 터진 것이다. 우숩고 슬프지만 가장 확실히 와 닿는 설명이었다.




때론 마음보다 몸이 앞선다. 몸의 자세가 흐트러지면 조금씩 몸이 불편하고 결국에는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아픈 몸은 당연히 마음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사람의 모양새를 자세히 살펴보면 몸이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 걷는 모습은 안정적인가, 손과 발의 움직임과 얼굴 표정은 자연스러운가 등을 알 수 있다. 


'체면(體面)'이라는 단어는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얼굴'로 정의된다. 체면을 문자 그대로 풀어보면 '몸의 얼굴'이 된다. 그래서 체면을 세우는 것은 몸을 똑바로 해서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선생님은 머리를 자연스럽게 척추 위에 올리듯이 당기고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고 그것이 수평이 되도록 한 뒤 팔은 몸과 수평선이 되도록 편안하게 하고 무릎이 스치듯이 걸으라고 하셨다.


굽은 몸을 펴는데 필요한 척추 양옆을 따라 길쭉하게 뻗은 강한 근육인 '척추세움근(혹은 척추기립근)' 역시 체면을 세우는데 한몫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흔히 '체면을 잃다'라고 하면 사회적으로 지켜야 할 자기 이미지에 손상을 입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체면은 먼저 몸을 살피는 것에서 시작된다. 몸을 이해하고 몸에 가장 필요한 것을 챙기는 것이다.


사람은 중력을 피할 수 없다. 중력이란 살아있는 존재가 감당해야 할 것으로 인간 삶에서 피해갈 수 없는 시련이자 고통이기도 하다. 중력을 미워하고 피하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친구삼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달리 말하면 체면을 세우고 가볍게 사는 것이다. 자세를 바르게 해서 앉고 걷고 움직일 때 세상은 바뀐다.


지난 몇 주간 체면을 세우고 생활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덕분에 지난 해부터 심해졌던 턱관절 부정교합, 곧 하품을 하거나 입을 크게 벌리고 닫을 때면 턱관절에서 소리가 나곤 했는데 그것이 줄어들고 있다.


무엇보다 가슴을 펴고 생활하니 몸과 마음의 안정감이 느껴진다. 지난 주일에는 신자들과 미사를 드리는데 평안한 얼굴로 미사내내 신자들을 똑바로 바라보는 나를 발견했다. 그동안 자세가 흐트러져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는 깨닫지 못했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소양을 갖춘 것 같아 기뻤다.


험난한 세상에서 무게 중심을 잡고 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많은 의무와 복잡한 일, 관계의 어려움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가장 첫번째 일은 체면을 세우는 일이 아닐까. 


몸이 지구상에서 차지하는 공간은 극히 작지만 자세를 제대로 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이왕이면 가슴을 펴고 제대로 체면치레(체면이 서도록 일부러 하는 행동)를 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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