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
2007년 사제 서품식에서 제대 바닥에 부복했을 때 저는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당신의 종 바오로 수녀가 암을 앓고 있습니다.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
마치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와 마르타가 주님께 사람을 보내어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고 전한 것과 같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요한 11,3).
바오로 수녀님은 저와 중고등학교 성당 동기였는데 오랫동안 못 보다가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수녀님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길에 길동무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는데 수녀님은 2005년 종신서원을 하고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소임을 하다가 암에 걸렸던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듯 수녀님도 아마 처음에는 그렇게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린 자신을 미워하고 하느님을 원망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때 저는 미국에 있었지만 한국에 올 때마다 수녀님을 뵙고 편지나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수녀님의 3년간의 암투병을 지켜보았습니다.
수녀님께서는 고통속에서 암을 통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 자신의 성소가 암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2010년, 암 진단을 받은 3년 뒤 수녀님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요한 11,4).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결국 수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제게는 참 어려운 말씀이었고, 저는 죽을병 앞에서 무력할 뿐이었습니다.
저의 깨달음이 부족해서일까, 수녀님께서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에 하나뿐인 제 어머니가 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열두번의 항암치료를 두번이나 받으시면서 열심히 병마와 싸우셨습니다만 2013년, 암 진단을 받은 3년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6년새 사랑하는 두 사람을 암으로 떠나보내며 그제서야 그것이 그냥 죽을병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날 호스피스 병동을 나와 병원 마당을 산책하다가 어머니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은지, 천국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대답하셨습니다.
"꿈에 아주 아름답고 화려한 꽃밭에 갔었지. 온갖 꽃이 피어난 그곳에는 돌아가신 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있었단다. 천국이 그런 곳이라면 갈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제 어머니는 무덤에 계실까, 아니면 천국에 계실까 혼자 물어봅니다. 오늘 1독서의 말씀이 위로가 됩니다.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에제 37,12-13).
주님께서는 충실한 믿음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던 어머니에게 천국문을 열어주시고 아름답고 화려한 꽃밭에서 사랑하는 어머니의 엄마 아빠를 만나게 해 주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삶에 대해 알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끝나는 삶이 아니라 '무덤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삶'에 대해서 말하고 희망합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의 고통과 죽음이 하느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에서도 꺾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하느님의 함께하심이 아닐까요. 영광이란 하느님을 위한 화관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부활의 희망이 아닐까요.
바오로 수녀님은 암으로 고통 받으면서 말했습니다.
"왜 '암'이 제게 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오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선물은 준비하는 이의 마음이 가득 담긴 것입니다.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이것 저것 생각하시는 하느님이 느껴집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에 제게 가장 이롭고 좋은 것임을 믿습니다. 그 원인이 '저의 죄 때문이다'고 한다면, 회개할 시간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히 '누군가를 위한 대속이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부족한 저를 도구로 쓰시니 정말 광영입니다."
암은 수녀님에게 죽을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광영의 선물이었습니다.
제게도 수녀님의 암과 죽음은 선물이었습니다. 바오로 수녀님은 죽었지만 저는 제 이름 '하상바오로'에 담긴 '바오로'를 수녀님의 이름으로 여기며 그 몫을 제가 살아간다고 믿습니다.
수녀님은 세상을 떠났지만 늘 저와 함께 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삶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수녀님 덕분에 무덤에서부터 시작되는 삶이 무엇인지 늘 기억하고 성찰하게 됩니다.
수녀님께서 세상을 떠나기 전 제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려 봅니다.
"자신의 고민에 빠지기보다는 양떼에게 관심을 가지고 양떼를 향해 서 있어주십시오. 주님의 충실한 일꾼이며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을 드러내는 사제로 행복하십시오. 삶이 지치고 힘들어 절망하고 싶을 때 저의 기억이 신부님 안에서 작은 생명을 밝힐 수 있다면 그것이 저의 부활이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저는 신부님을 지지하며, 다시 만난 날까지 저의 기도는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안녕!"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수녀님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수녀님에 대한 기억으로 저는 지치고 힘들고 절망적인 삶에서도 생명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수녀님의 부활입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끝나는 삶이 아니라 부활을 희망하는 삶, 무덤에서부터 시작된 새로운 삶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