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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되기

(마음만은) 새 사제를 위한 기도

5월 12일은 나에게 특별한 날이다. 16년 전 오늘, 2007년 5월 12일 사제서품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칭 '오월의 신부'다.


오늘 사제관 신부님 여섯분이 학생 서른명을 데리고 한티성지로 걸어가는 '한티아고'를 떠나는 관계로 미사 주례를 대신하게 되었다. 강론을 위해 복음을 묵상하면서 '친구'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어릴 때는 친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다다익선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인기를 증명하는 것이었기에. 


이제 나이가 들어보니 친구란 많이 가지기도 어렵지만 참된 친구란 적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하나뿐인 내 목숨까지 내어줄 친구가 있는지 물어본다면 말해서 무엇할까!


또 한가지, 친구란 얻거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되어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16년 전 새벽, 사제서품식을 앞두고 잠에서 깨어 떨리는 마음으로 쓴 일기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게는 아주 특별한 오랜 친구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 그를 만나고 배우고 알고 믿고 함께 걷기를 어느새 이십 년이 되었다. 그런데 실은 그가 나를 '먼저' 친구 삼았다."


나에게 먼저 친구가 되어 준 그분에 대한 나의 응답이 바로 사제서품이었던 것이다.


친구가 되기로 약속을 하고 십육년이 지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그에게 충실한 친구로 살아왔는가, 믿을만한 친구로 지금 곁에 머물고 있는가?


나는 누구에게 진실한 친구가 되어주었는가?


친구란 웃고 울게 만들고 한없이 즐겁다가도 슬프게 하는 나의 분신, 내 모습을 가장 많이 가진 아바타 같은 존재가 아닐까. 때론 너무 좋지만 때론 너무 싫은, 그래서 내가 어쩔 수 없는 사람, 바로 나 자신.


그래서 친구없는 나는 생각할 수가 없다. 적어도 그분이 나를 친구 삼고, 나를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부르기에 나는 그분으로 인해 친구됨을 잘 살아야 한다.


그것은 그분의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를 지키는 것이다. 친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그 사랑을 매일 다짐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16년 전에는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왠지 지금은 자신이 없다. 아마 새 사제의 마음이 낡고 헗어버린 까닭이리라. 


먼 곳에서 날아온 사제서품 축가를 듣는다. '새 사제를 위한 기도'가 바로 나를 위한 기도임을 알기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새 사제를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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