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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평화로울 수 없는가?

현존의 힘

'생각의 쓰레기', '감정의 찌꺼기'라는 표현이 최근 마음에 머물고 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의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I may be wrong)>와 에크하르트 톨레의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A new earth)>를 읽으며 얻은 결론이다.


생각과 감정은 시도때도 없이 일어난다. 그런데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은 아무 이유나 근거도 없는 그저 왔다가 가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 생각과 감정의 90%는 쓸모없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생각하고 염려하는 일의 90%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쓸모없는 생각과 감정은 계속해서 생기는가? 


그것은 내 안의 '에고(Ego)'가 부추기기 때문이다. 에고는 언제나 눈에 띄고 싶고, 특별해지고 싶고, 지배하고 싶고, 힘을 갖고 싶고, 관심받고 싶고, 더 많이 원한다. 


이런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이 있을까, 반문하고 싶겠지만 에고의 밑바탕에서 모든 행동을 지배하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존재하지 않게 될 것 같은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이다. 


결국 에고의 모든 행동은 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하지만 에고는 기껏해야 가까운 관계, 새로운 소유물, 혹은 이런저런 성취들로 일시적으로 이 두려움을 덮어 버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그래서 내 안의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그랬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다가 드는 생각은 쓸모없는 그날 일에 대한 염려이며, 아침 미사에서 어떤 동료 사제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면서 따라오는 부정적인 감정은 아무 관련 없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의 쓰레기, 감정의 찌꺼기는 에고가 자신을 알리고 키우는 방법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부추기고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함으로써 그 자리에 현존하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낫다'는 에고를 키운다. 


에고는 '나'라는 자아의식을 부여받아 반복해서 일어나는 생각 형태들과 조건 지어진 정신적 감정적 패턴들의 복합체이다.


생각해 보라. 머릿속에서 절대로 말을 멈추지 않는 목소리라고 당신이 알고 있는 그것은 사실 그칠 줄 모르는 강박적인 생각의 흐름이다. 모든 생각이 당신의 관심을 온통 흡수해 버리고, 머릿속 목소리와 그것에 동반되는 감정에 너무도 동일화되어 모든 생각과 감정 속에서 자기를 망각할 때, 당신은 형상과 완전히 동일화되어 에고의 움켜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믿으며 생각과 감정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휘둘리도록 허락하는 것은 실상은 '정신이상'과 다를 바 없다. 정신이상의 뿌리는 생각과 감정과의 완전한 동일화, 즉 우리가 만든 에고만이 있을 뿐이다.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에고를 알아차리는 것 뿐이다. 알아차림은 현재의 순간 속에 머무는 것, 곧 '현존'의 힘을 세상 속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라보고 있는, 살아가고 있는 '인생'은 그저 인생이라는 두 글자, 다시 말해 문자일 뿐이다. 인생이라는 두 글자의 뒤안길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과 의지야말로 인생이라는 글자로 표현된 실체이다.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가 우리 안에 깃든 욕망의 본질이다.


인생은 고통이며,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되고, 따라서 집착을 버림으로써 우리는 고통의 소멸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오래된 기억을 지속시키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이 에너지 장 안에 오래된 감정적 고통의 축적물을 지니고 있다. 이것을 '고통체'라 하는데 나는 그것을 감정의 찌꺼기라 부른다.


고통체에게는 주기적으로 자신을 보충하는데 필요한 먹이가 필요한데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이 그것이다. 부정적인 생각만이 고통체의 먹이가 된다. 그런데 자신조차도 이것을 멈추고 싶어하지 않는다. 고통체에게 고통은 쾌락이다.


그러므로 현재 자신의 내면 상태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에 의해서만 고통체 너머로 갈 수 있다. 남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정당한 상황에서도 남을 비난하는 한, 당신은 자신의 생각으로 고통체에게 계속 먹이를 주면서 에고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에고로 표현되는 인간의 무의식일 뿐이며 이것을 깨닫는 것이 평화를 가져온다. 


대부분의 사람은 생각한다. '나는 평화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 혹은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지금 평화로울 수 없다고 믿는다. 만일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저러한 것을 얻는다면 평화로울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평화가 가능한 유일한 기회는 지금 이 순간밖에 없다.


지금 평화로울 수 있는 방법은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는 것이다. 현재는 삶의 놀이가 일어나고 있는 장이다. 내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살고 있다. 삶은 춤추는 자이고 나는 그 춤이다. 삶은 본래 그러하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삶의 진리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한 '나를 따르려면 네 자신을 버리라'고 하신 말씀은 끊임없이 지나가 버리는 것들처럼 나 역시 존재하지 않는 자신에 매달리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마음의 내용물인 에고가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동일화를 버리라는 말씀이다.


'나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 때문에 결코 동요되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깨달은 바다. 대신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1테살 4,11)라는 가르침을 매일 실천하고자 한다. 이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깨어있는 자로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기고, 열정을 가지고 매일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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