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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면 계속 달려야 합니다

경주국제마라톤 후기

내 나이 50이다. 지난해 탈장수술을 했고, 지난 유월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은 내게 말하곤 했다. '그동안 뛸만큼 뛰지 않았느냐?' '나이를 생각해야지.' '어른이 되어야하지 않겠나?'


도대체 나이는 무엇이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일까?


사람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기에 내 마음에도 '타협'이라는 것을 통해 적당히 안주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내 몸은 계속해서 달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6년만에 풀코스 마라톤을 신청했다. 거의 10년만에 경주국제마라톤으로 돌아가 확인해보고 싶었다. 50에 30대 나이를 살 수 있는지, 내 몸과 마음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공부한 바에 따르면 사람에게는 실제 나이와는 다른 '주관적 나이(Subjective Age)'가 있으며 나에게 그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


7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마라톤 훈련은 지금까지 내가 했던 어떤 훈련보다 강도 높은 것이었다. 매 주말 20킬로미터에서 시작해 2킬로미터씩 늘려 34킬로미터까지 장거리를 뛰었으며, 하프마라톤을 레이스 페이스로 뛰기도 했다. 거기에 스피드 훈련, 템포런을 추가해 많이 뛴 주간은 90킬로 넘게 뛰기도 했다.


목표는 1킬로미터를 4분 30초에 뛰어 풀코스를 3시간 10분내에 완주하는 것이었다. 


다시 처음부터 하나씩 하나씩 배워나갔다. 한창 더운 여름에는 밤 늦게 뛰었고, 비가 오는 날에는 비를 맞으며 뛰었고, 일정때문에 뛸 수 없는 날에는 다른 날 달렸다. 


강도높은 훈련을 하며 내 몸에 대해, 체계적인 목표 접근방법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스피드를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달려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서브쓰리를 할 수 있는지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삼개월동안 마라톤 훈련을 중심에 두고 살았다.


그렇게 10월 21일 경주국제마라톤 출발선에 섰을 때 남은 것은 그동안 연습한 것을 펼쳐내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다 그럴까, 아니면 원래 그런걸까...왜 마음 먹은대로 되는 것, 쉬운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일까!


첫 출발부터 정말 쉬운게 하나도 없는 레이스였다. 속도를 아무리 높여도 1킬로 4분 30초 벽을 넘기는 어려웠고 조금만 방심하면 4분 40초로 미끄러졌다. 계속해서 밀어붙이는 수밖에.


하프를 통과할 때 시간이 1시간 35분이었으니 계획했던 3시간 10분은 이룰 수 없음을 알았다. 


만일 자신의 목표가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할까? 


나는 잘 몰랐다. 이대로 꾸준히 달려 포기하지 않고 레이스를 마칠 수만 있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가끔씩 멈춰서려는 무거운 발, 무엇보다 통증 때문에 '힘들다' '아, 그만!'이라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완주도 다행이다 싶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군대가 나타났다. 발소리를 착착 맞추어 거친 숨을 내쉬는 무리가 내 바로 뒤에 와 있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들이 3시간 20분 페이스 메이커와 함께 달리는 마라토너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다음부터는 전쟁이었다. 적어도 3시간 20분 페이서들에게는 지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과 눈 앞에 있는 그들을 힘겹게 쫓아가는 몸의 한계 사이의.


32킬로미터에서 시작된 3시간 20분 러너들과의 엎치락 뒤치락 시소게임은 38킬로미터 지점에서 결판이 났다. 마음을 비우고 무조건 깊이 호흡하면서 박자에 맞춰 발을 내디디는 기초에 충실한 달리기로 그들을 앞서 가기 시작했다. 


무척 힘이 들었던 레이스는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3시간 18분 50초 기록으로.


나의 마라톤 페이스와 기록증




달리면서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풀코스 마라톤의 고통을 스스로 선택하는지 궁금했다. 일그러졌지만 아무도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은 몰입한 얼굴들, 다리에 쥐가 나 걷는 사람, 두 팔 없이 달리는 아저씨, 길가에 드러누운 사람까지 모두 자신만의 이유와 사연으로 달리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 지난 6년동안 (코로나 때문이었지만)하프마라톤을 도전으로 생각하며 뛰었고, 일상의 달리기로 나름 잘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풀코스 마라톤은 내게 몸과 마음의 '한계체험'을 통해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가르쳐 주었다. 


더 이상 못할 것 같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버티며 이를 꽉 깨물고 몸과 마음을 끝까지 몰아감으로써 깨닫는 것.


살아있다는 것은 숨만 제대로 쉬는 것으로도 가능하지만 나에게 살아있다는 것은, 몸과 마음을 온전히 바치고 그에 따른 극한의 고통을 통해서 체험되는 것이다.


종종 내가 쓴 <살아있다면 계속 달려야 합니다> 책 제목을 잘못 써서 앞으로 살아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달려야 하는 운명을 웃으며 한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살아있다면, 그렇게 살고자 한다면 계속 진지하게 (풀코스 마라톤을)달리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깨닫는다.


몸은 유한하다.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나약한 몸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몸은 위대하다. 몸은 마음을 써서 돌보고 가꾸면 큰 일도 할 수 있다.


몸은 아름답다. 오늘 전교주일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주일미사에서 사제가 성찬기도 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할 때 그 말의 깊이와 뜻이 내게 와 닿아 전율이 돋았다. 


살아있다는 것, 몸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풀코스 마라톤으로 깨달은 모든 것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나의 몸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끝까지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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