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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기꺼이 참거나 죽어도 못 참는 것

<한국의 능력주의>

실제상황 1. 교양수업 점수를 79점 받은 학생이 자신의 성적에 이의를 제기하며 문자를 보내왔다. 자세히 설명해 주니 본인도 받아들여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학생이 화를 내며 다시 연락이 왔다. '자신이 79점 받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같은 조에서 시험도 치지 않은 다른 학생이 자신과 똑같은 79점을 받은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으니 시정해 달라고.' 


불평등은 참아도 불공정은 못 참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이다. 달리 말하면,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불평등은 정당하지만 그 과정이 불투명하다면 참지 못한다. 이는 평등(equality)이 아니라 형평(equity), 곧 기여, 투자, 노력에 따른 차등 분배다.


오히려 차등 분배에 따른 불평등은 사회정의이며 특권의 불평등에는 분노하지 않지만 특권에 접근할 기회의 불평등에는 분노한다. 


어떻게든 나도 부자가 되고, 서울대 가고, 정규직이 되어야 하니 그런 불평등은 용인된다. 사람들은 불의한 구조 자체를 의심하기보다는 타인이 '공정한 룰'을 어겼는지 여부에만 촉각을 곤두세운다.


대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 "지금 대학생들은 수능점수의 차이를 모든 능력의 차이로 확장하는 사고를 갖고 있으며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택한다."(사회학자 오찬호)


이런 상황들은 우리 주변에 많다. 한국인의 과도한 생존 본능, 경쟁 의식, 지위상승 욕구 등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오랫동안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그 실마리를 찾았다.


한국은 자본주의와 능력주의 체제의 최첨단에 선 사회다.


능력주의는 능력과 노력에 따른 응분의 보상체계다. 능력이 우월할수록 더 많은 몫을 가지고 능력이 열등할수록 더 적은 몫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개인의 능력차에 따른 불평등은 자연스럽다. 


위 문장이 아무 거리낌없이 받아들여진다면 이 글을 읽는 사람 역시 능력주의 신봉자다. 그만큼 능력주의는 우리 사고와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의 능력주의>를 쓴 박권일은 천년도 전에 시행되었던 과거제도에서 능력주의의 뿌리를 발견한다. 한국 사회는 개인간의 공정한 경쟁과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능력주의를 발전시켜 왔다.


실제상황 2. 지난해 입학한 약학대학 1학년 학생 가운데 내가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받은 학생이 있었다. 참한 학생이기에 함께 할 대학생활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1학기를 마치고 의대진학을 위해 휴학을 한다고 했다. 축복하며 떠나보냈는데 얼마전 찾아와 모 대학 의대에 합격했다고 너무 기뻐해 나도 참 기뻤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대 입학을 천국의 열쇠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사회가 돌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사람은 의사만이 아니라 약사, 청소부, 배달원, 주방장, 선생 등 수없이 많은데 우리나라는 어떻게 모든 국민이 의사만 되고 싶어할까!


중소도시에 필수 의료인력이 모자란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연봉 4억을 줘도 의사를 구하지 못해 병원을 문 닫아야 한다는 뉴스를 보면 의아할 뿐이다. 소아과 진료를 받기 위해서 부모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병원 앞에 줄을 서 대기표를 받고도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의사들은 정부의 의사증원 대책에 목숨을 걸고 저항한다. 


우리나라 의사는 더 이상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인류 봉사'에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는 숭고한 대의는 집단 이기주의 앞에서 무력해 보인다. 


한국 능력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은 '시험을 통한 지대추구(rent seeking)'의 정당화다. '결정적 시험(critical examination)'을 통과하기만 하면 과도한 특권을 부여받는다. 


지대 추구란 땅을 소유했다는 사실만으로 이익을 얻는 것인데 실제로 이익을 창출하는 것은 그 땅에서 일하는 생산자인데도 그렇다. 물론 공정을 가장한 경쟁을 통해 승자가 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문제는 승자독식이 제도화되고 그로인해 부익부 빈익빈이 고착화되는 경우다.


공익을 위한 의사 증대에 의사들이 관여하면서 진입장벽을 만든 의사는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축적하는 집단이 되었다. 그리고 상속이나 세습은 아닌 것 같지만 자녀와 친척을 그 길로 어떻게든 가게 만드는 위장된 신분제로서 현실적 능력주의를 보여준다.


실제상황 3. 인성교육원 프로그램으로 3학년 대학생들과 함께 2박 3일 '한티가는 길'을 걸었다. 하룻길을 걷고 저녁에 둘러앉아 지금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인지 물으니 모두가 하나같이 불안한 미래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자신이 3루타를 친 줄 안다.(Some people are born on third base and go through life thinking they hit a triple)"(베리 스위처)


국민 모두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던 조국의 딸 조민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공정성이 얼마나 주관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스펙 품앗이를 통해 부모의 도움으로 고등학교 때 이미 SCI급 논문의 1저자가 된 학생과 지방에서 교내 방과후 활동을 하는 학생의 차이는 인생 출발선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준다. 


더 놀라운 사실은 소위 SKY 대학생들이 말하는 공정성과 그들이 보여주는 분노가 또 다른 특권적 집단의 인식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 역시 적어도 1루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전적으로 우연히, 그러나 너무나 불평등하게 주어지는 조건 덕에 개인적 자질을 쌓을 수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1루를 밟지 못한 사람, 아예 야구 경기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도 적지 않다. 순전히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 문제로 치부되곤 하는 생각의 이면에는 지독한 능력주의가 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하고, 이루지 못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은 개인의 책임이라고 말할 때 사회구조적 모순은 온전히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문제가 되고 만다.


안타까운 것은 어차피 선택받은 소수와 그들만의 리그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들을 이류로 여기는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교육과 사회의 핵심이 능력주의이기에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31조 1항)




나는 거대한 능력주의 앞에 무기력한 한 사람일 뿐이다. 물론 학생들에게 능력주의의 폐해와 정의와 관용에 대해 가르치지만 나 역시 나름의 특권을 누리며 살고 있다.


더 안타까운 현실은 가지지 못한 상대적 약자들 사이에 신분 구별 전쟁을 목격할 때이다. 소비자본주의를 최대가치로 삼는 사회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려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공정한 경쟁이라는 이름의 '무임승차론' 혹은 '역차별론'은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은 외면하고 우리끼리 싸우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듯 능력주의는 기회와 과정의 근본적 불평등, 즉 실질적 불공정을 은폐하고 형식적 공정성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알랭 드 보통)


능력주의는 계급차별, 인종차별과 같이 개별 인간의 가치를 서열화한다. 능력주의를 과도하게 내면화한 이들은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죄의식을 못 느낀다.


만일 우리 사회가 비정규직 본래의 가치를 살릴 수 있다면 어떨까. 본래 비정규직은 회사에 노동유연성을 제공하고 고용불안정을 감수하는 대신 임금을 더 받아야 하는 고용 유형이다. 프랑스는 임금의 6-10%, 호주는 15-30%를 추가로 받는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한번 비정규직은 영원한 비정규직이다.


한때 우리나라의 희망으로 여겨졌던 586세대를 보면서 학력과 지식수준으로 우리사회에 주류가 된 그들 역시 자본축적에 몰두하는 우파상인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권력과 자원을 독점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구현하면서 선거 때만 우리를 유권자로 대우할 뿐이다.


"불평등은 경제적인 것이 아닌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다."(토마스 피케티)




예수님께서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1-16)에서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고 말씀하신다.


하루 한 데나리온의 정당한 품삯을 약속하고 이른 아침부터 일꾼들을 모았는데 오후 3시와 오후 5시에도 나가서 일꾼들을 데려왔다. 놀라운 것은 품삯을 계산할 때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이 똑같은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는 것이다. 


늦게 온 사람부터 품삯을 계산할 때 더 받으려니 기대했던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은 나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하지만 주인은 약속한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었고 불평하는 우리에게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하고 물으신다.


그리고는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하고 되물으신다.


고개가 숙여진다. 내 마음에 담긴 형평에 따른 차등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아시는 듯, 실제로 능력주의를 신봉하며 살아가는 나를 꾸짖고 계신 듯 하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더 와 닿는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


모두가 첫째가 되고 싶어하는 사회에서 그 기준으로 능력에 따른 차별을 당연시 한다면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아직도 멀리 있다. 


모두가 첫째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서 '가장 작은 이'인 꼴찌를 만나고, '그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 수 있을까.


경제적 풍요만이 지상최대의 과제이자 목표인 시대는 지나갔다. 경제성장은 계속될 수 없다. 자연과 지구가 벌써 그 경고를 보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돈이 아니라 삶을 생각해야 한다. 로봇처럼 무조건 소유하지 말고 사람답게 공유할 줄 알아야 한다. 


모두가 죽는데 나만 살아남을 수는 없다. 경쟁과 승자독식의 능력주의는 버리고, 이제 유대와 관용, 타자에 대한 신뢰와 인류 문제에 대한 공동 관심을 통해 삶을 돌봐야 한다.


경제적 풍요에서 삶의 질 쪽으로 관심을 옮기는 조용한 혁명(Silent revolution)이 일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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