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아톤>: 누구나 처음이 있다 2

2005년 4월 어느 날, 한국 영화 <말아톤>을 보았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다섯살 지능의 스무살 청년 초원이(조승우 분)가 2001년 춘천마라톤 대회에서 서브쓰리(3시간 이내 풀코스 완주)를 한 실제 이야기였다. 한국에서 500만명이 보고 감동했던 것처럼, 달릴 때 가장 행복한 초원이를 보며 그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나도 초원이처럼 마라톤을 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출처: 영화 <말아톤>


클리브랜드 신학교에 유학 온 유일한 외국인으로 살면서 말도 잘 안 통하고 이해도 느리고 학업에서도 늘 뒤처져 있던 나는 초원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멋진 말이나 뛰어난 머리로 나를 보여주기보다 몸으로 ‘내가 여기 있다.’하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 역시 초원이처럼 ‘백만 불짜리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내가 처음으로 뛰었던 마라톤 대회가 떠올랐다.


일반 대학교 2학년 때 과 후배들과 술을 먹다가 객기로 경주 벚꽃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선밴데 적어도 하프 마라톤 정도는 뛰어야지.’하고 준비를 했는데 연습 막판에 무리하다가 부상을 당해 10킬로미터로 변경해 대회에 출전했다.


벚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경주에서 10킬로미터를 거의 완주할 무렵, 갑자기 수백 명의 여학생들이 도로로 뛰어들어 달리는 사람들과 엉겨 엉망진창이 되었다. 소리 지르며 도로로 뛰어 들어온 여학생들은 그날 마라톤에 참가한 H.O.T.의 강타와 토니를 보러 온 열성팬들이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지는 벚꽃 사이에서 괴성을 지르며 도로로 뛰어 들어오는 볼 빨간 소녀들의 모습은 첫 마라톤의 기억을 모두 삼켜 버리고도 남았던 것이다.




내가 초원이처럼 뛰고 싶었던 것은 하프코스 완주였다.


인터넷을 검색해 6주 훈련 프로그램을 찾았고 대회는 5월 22일에 있을 클리브랜드 락앤롤(Rock & Roll) 마라톤 대회였다. 대회를 준비하는 동안에 이레네오 성인(St. Irenaeus, 130-202)이 남긴 말을 읽었다: “살아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The glory of God is the living man)."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그의 이름처럼, 그는 교회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며 이단에 맞서 정통교리를 수호하다가 순교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삶이 인간의 길임을 믿고 가르치고 수호하다가 목숨까지 바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살아있다는 것,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그것을 달리기를 통해서 다시 체험하면서 하느님을 바라보며 달리다보면 하느님의 영광을 내가 가진 몸으로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함께 뛰기로 한 학부 신학생 크리스(Chris Zerucha)와 ‘살아있는 사람 1(Living Man 1)’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함께 마라톤 연습을 하면서 우리만을 위해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신학교 교수 신부님 가운데 한 분이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신의 저항군(LRA: Lord's Resistance Army)이라는 무장 게릴라 반군에게 납치되었다가 탈출한 아이들을 돕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LRA는 우간다 정부에 반대해서 생긴 군사집단으로 죠셉 코니라는 악명 높은 우두머리에 의해 지난 30년간 10만명 이상의 민간인 학살 뿐만 아니라 6만명이 넘는 어린이들을 납치해 소년병과 성노예로 삼았는데 '보이지 않는 어린이들(Invisible children)'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세계에 알려졌다.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으로 그 어린이들을 위해 신학생들과 지인들에게 후원을 요청했고 $120을 모을 수 있었다.




마침내 대회일이 되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21킬로미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도시의 도로 한가운데를 달리면서 내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달리기에 대한 동물적 본능이 깨어났다.


목표를 향해 전력질주하는 가운데 동물적으로 가장 살아있는 순간을 맛보았다. 이성과 매너의 프레임에 갇히지 않은 자유가 팔과 다리, 심장과 폐를 통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고 영혼마저 고양시켰다. 숨은 몸의 박자며, 땀은 몸의 환희였다.


달리기가 몸을 통해 나에게 주는 고통과 한계를 느끼며 결승선을 향해 뛰어갈 때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존재 방식이 있음을 깨달았다. 1시간 39분의 가슴 벅찬 체험이었다.


그날 밤 하루의 일을 돌아보며 일기를 적었다. 그리고 4663 번호표와 완주메달을 앞에 놓고 조용히 기도하였다. 신학생으로서만이 아니라 젊은 인간으로서 새로운 길에 들어섰음을 느꼈다. 땀과 호흡으로 느꼈던 달리는 일이 가져다준 육체적 재미만이 아니라 가난한 어린이들을 기억하며 행동한 의미(意味), 나아가 몸을 내어줌으로써 더 깊은 자신을 발견한 삶의 묘미(妙味)를 깨달은 것이다.


나의 작은 상상이 맺은 생생한 결실을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달렸고 땀을 흘렸고 환히 웃으며 마쳤다. 그리고 내년 이맘때 생애 첫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하고픈 꿈이 생겼다. 어려운 삶을 견딜만하게 해 줄 꿈이었다. 하지만 그 꿈은 예상치 못한 만남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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