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인 대축일
지난 10월 11일은 잊지 못할 날이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된 날이기 때문이다. 그날은 금요일 오후라 마라톤 장거리 훈련으로 34킬로미터를 뛰어야 하는 날이었는데 기분이 좋아서 36킬로를 달렸다.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에도 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기자회견이나 축하식을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 한승원 작가는 말하길, 지금 세계는 한창 전쟁 중인데 이런 인간성 말살과 폭력 극치의 때에 잔치를 어떻게 열겠느냐고 말했다.
몇 주가 지나 포니정 수상식에 처음 등장한 한강은 몇년 전부터는 커피도 끊고 좋아하는 여행도 그만두고 그저 글쓰는 일을 낙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한강은 예전처럼 일상을 살면서 작가 창작의 정점인 60세까지 남은 시간동안 자기 마음 속에 맴돌고 있는 것들을 세권의 책으로 써내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참 멋진 사람이다.
한강은 세상에 가득찬 고통에 천착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숨겨둔 5.18 사진첩을 몰래 보며 각인된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고 다가가 품에 안고 함께 걸어왔다. <소년이 온다> 초고를 쓰고 택시를 탔는데 악뮤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마음이 이해가 된다.
고통에 너무 가까이 있으면 그 고통이 스며들어 사람을 어둡게 하는 법이다. 그래서일까, 한강은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자 남편이 이렇게 되물었다고 한다.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아. 여름엔 수박이 달고, 봄에는 참외도 있고, 목마를 땐 물도 달잖아. 그런 것 다 맛보게 해 주고 싶지 않아? 빗소리 듣게 하고, 눈 오는 것도 보게 해 주고 싶지 않냐?”
다른 건 몰라도 수박이 달다는 사실에서 웃음이 났다는 작가는 엄마가 되었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다. 살아있던 죽었던 우리 주위에 살고 살았던 성인들을 기억하며 축하하는 날이다.
성인(Saint)이란 누구를 말할까?
오늘 1독서에서 말한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
그렇다. 세상에 수많은 고통을 겪어낸 사람들, 이들은 성인이다.
오늘 2독서에서는 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1요한 3,1).
성인은 하느님께 사랑받는 사람이다.
성인은 위대한 사람,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성인은 상처와 고통 속에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오늘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성인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이태원 참사로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하며 위로하는 이웃들, 큰 병 때문에 아프지만 사랑하는 이들 앞에서 참는 사람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수도자들, 자기 일을 묵묵히 성실히 해내는 필수 노동자들, 이들이 내가 매일 만나는 성인들이다.
세상에는 고통이 가득하지만 그 안에 빛나는 아름다움도 있다는 것, 내 주위에 수많은 성인들이 살고 있음을 알려준 한강 작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