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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나의 것

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제가 아는 사람 가운데 자신의 이름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지극할 지’자에 ‘보배로울 옥’을 써서 ‘지극히 보배롭다’는 뜻으로 ‘지옥’인데 그 이름 때문에 그분의 삶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습니다. 참 좋은 뜻이었지만 결국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후남’이라는 분도 계신데 아들을 낳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그래도 ‘말녀’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이런 이름들을 바꾸면 사람의 운명이 바뀔까요? 많은 사람들이 개명을 하는 것도 더 좋은 운명이나 운세를 위해서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인도에 어떤 젊은이 이름이 ‘파파카’였습니다. 왜 그런 이름이 지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 뜻은 ‘나쁘다’입니다. 젊은이는 사람들이 자신을 부를 때마다 ‘나쁘다’하는 것이 너무 듣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분에게 가서 이름을 바꾸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은지 물었습니다. 지혜로운 이는 ‘여행을 떠나 사람들의 이름을 물어본 뒤 결정하자.’하며 그를 보냈습니다.  


여행길에 젊은이는 장례행렬과 마주쳤습니다. 죽은 이가 누구인지 물으니 ‘지바카’라고 했습니다. “지바카는 ‘살아있는 자’ 아닌가요?”하고 되물으니 누군가 대답했습니다. “이름이 ‘살아있는 자’든 ‘죽은 자’든, 때가 되면 죽을 수밖에 없네. 이름은 단지 어떤 사람을 가리키기 위한 단어일 뿐이야.”


다음에 젊은이는 길을 가다가 어떤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맞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런지 물으니 갚을 돈이 없는 남자가 빚진 이에게 맞고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매맞는 남자의 이름은 ‘다나팔리’, 곧 ‘부자’였습니다. ‘왜 부자가 돈이 없지요?’하고 물으니 누군가 대답했습니다. “이름이 부자이든 빈자이든 돈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나? 이름은 단지 그 사람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에 불과할 뿐 진짜 모습이 아니야.”


이제 젊은이는 무언가 느낀 것이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길 잃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의 이름은 ‘판타카’, 곧 ‘길 안내자’였습니다. ‘어떻게 길 안내자가 길을 잃을 수 있죠?’하고 물으니 그가 대답했습니다. “이름이 길 안내자이든 관계없이 나는 지금 길을 잃었네. 이름은 단지 어떤 사람을 가리키기 위한 하나의 단어일 뿐이야. 그 사람의 실체가 아니잖는가.” 


지혜로운 어른을 다시 만난 젊은이는 말했습니다. “이름이 ‘살아있는 자’여도 죽을 수 밖에 없고, ‘부자’라는 이름을 가졌어도 돈이 한푼도 없을 수 있고, ‘길 안내자’라 해도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이름이라는 것이 단지 어떤 사람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이며 행위입니다. 그것이 그의 진정한 이름입니다. 저는 제 이름에 만족하기 때문에 이름을 바꿀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여러분은 운명을 믿나요? 내게 주어진 이름처럼 내게 주어진 운명같은 것이 나를 결정할 것이라 믿습니까? 그런 것들은 많습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 곧 나의 가족, 주변 환경, 다른 사람들, 타인의 시선까지도 이름이나 운명처럼 내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결국 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단어나 말, 혹은 다른 사람일 뿐이죠. 그것을 내가 어찌하려는 마음을 접고 편히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셉의 아들, 혹은 예수라는 당신의 이름을 물은 것이 아니라 당신의 진정한 이름, 곧 그분의 내면과 행위가 드러나는 본질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성령의 도움으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곧 요나의 아들 시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반석이라는 이름을 얻은 베드로, 그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나이 많고, 배운 것도 없고, 능력도 부족한 그를 어째서 예수님은 ‘반석’이라 불렀을까요? 베드로는 한가지 확실히 아는 것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것은 있는 그대로 편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떤 상황이나 다른 사람들을 바꾸려하지 않고 인정했습니다. 그에게 왜 어려움과 고통이 없었겠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박해받고 있는 그리스도교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를 시기하고 오해하는 사람,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받아들였기에 그 고통 때문에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려움이라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바꿀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해결하는 길이란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달라지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번 스스로를 다스리고 인내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나고 흠집있던 원석이 갈고 닦아져 빛나는 반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모든 일이 지나가는 것임을 알고,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에 이르는 과정, 바로 반석이 되는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하늘 나라의 열쇠란 바로 우리 자신이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진리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하늘을 열고 닫는 것은 오직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 바꿀 수 없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변화되어 반석이 되는 길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진정한 이름이란 그 사람의 내면과 행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면서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과 어두운 세상에 등불과 같은 성인의 이름, 곧 세례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름들이 가진 진정한 내면과 행위를 드러낸다면, 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인내한다면 우리 모두가 반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름이나 운명은 나를 결정짓지 않습니다. 운명은 나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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