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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언지교(不言之敎)

자존심이 부서진 그대에게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사람들에게 날마다 놀림감이 되고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는 것이 너무 힘들어 예언자 예레미아가 탄식하며 하는 말입니다.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니 자존감은 무너지고 이런 상황이 너무 힘들어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다고 그는 외치고 있습니다.  


월형을 받은 ‘신도가’의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중국에는 예로부터 다섯가지 형벌이 있었는데 묵형은 이마나 얼굴 팔 등에 먹물로 죄명을 새기는 것입니다. 의형은 간음한 사람의 코를 베는 형벌이며, 궁형은 생식기를 잘라내는 형벌입니다. 대벽은 목숨을 앗아버리는 사형입니다. 월형은 도둑질한 사람에게 가하는 형벌로 도끼로 발꿈치를 찍어 내는 것입니다. 목숨을 앗아가는 대벽을 제외한 다른 신체형은 한 사람의 생애를 사람들에게 하나의 구경거리로 만드는 잔혹한 형벌입니다.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평생 죄인으로 대중에게서 분리된 정신적 모멸감을 겪게 만듭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형벌을 받게 만들며 타인의 시선은 지옥입니다. 어느날 자다가 발가락이 가려워 긁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순간 발가락이 잘려 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의식은 있지도 않은 발가락이 가렵다고 계속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월형으로 발 병신이 된 신도가에게는 19년을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한 ‘자산’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자산은 귀족이며 풍채가 좋은 청년인데 전과자 친구를 부끄러워 했습니다. 같이 공부를 마치고 나면, “내가 먼저 나가면 자네는 남아 있게.” 혹은  “자네가 먼저 나가면 내가 남아 있겠네.”하고 말하곤 했습니다. 귀족인 자산의 행차를 보면 사람들은 공손히 허리를 굽혀 비키는데 신도가와 함께 가면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신도가 역시 친구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발 자체의 고통보다 섭섭함, 모멸감, 원망으로 인해 신도가의 자존심은 산산히 부서졌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신도가는 스승이 19년이 지나도록 자신이 발 병신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늘 자기 고통과 자기 연민에 빠져 있다가 불현듯 스승이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보지 않음을, 곧 중요한 것은 마음이지 겉모습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스승은 신도가가 세상과 사람들의 편견과 부정적 시선과 끊임없이 싸우는 19년동안 한마디 위로나 격려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도가는 그것이 말하지 않는 가르침, 곧 ‘불언지교(不言之敎)’임을 깨닫습니다. 그 가르침은 세상의 모든 기준이란 스승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자신을 괴롭혔던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신도가는 마침내 마음의 응어리가 모두 풀리고 사람들의 편견과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자존심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가짐입니다. 만일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며 타인이 존중해 주는 것이면 그건 자존심이 아니라 타존심입니다. 타존심에는 결코 만족과 평화가 없습니다. 스스로를 믿고 존중한다면 그 누구도 나의 자존심을 해칠 수 없음을 신도가는 깨달은 것입니다. 


신도가의 스승은 거울같은 존재로 그의 고요한 마음이 물처럼 깊어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비춰줍니다. 그에게 갔던 자는 자기 스스로 성찰하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위로받고 스스로 충만해진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불언지교, 말로 가르치지 않고 누구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존재, 누구나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맑고 깊은 물같은 존재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먼저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우리 십자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넘어져도 탓하지 않고 그냥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의 상처와 고통을 담담히 바라보고 눈물지으며 함께 십자가를 지고 걷는 예수님은 깊고 조용한 물처럼 불언지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우리의 몸이란 멋지게 단장한 몸이 아니라 상처입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몸입니다. 월형을 받아 발꿈치가 잘렸으며 세파에 시달려 상처투성이인 몸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몸을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먼저 그런 몸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산 제물이란 바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의 모습 그대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로마 12,2). 세상은 외형과 외모만 중요하게 여깁니다. 남과 비교하고 겉만 가꾸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아보임으로서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려는 현세에 동화되어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면 이것은 추하다.” 아름다움이란 획일화된 것, 합의된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아름다우며 나 자신이 느끼는 아름다움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아름답다고 하시기에 아름다운 것이지 세상 사람 모두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세의 아름다움은 현혹이며 가짜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조용히 ‘너는 참 아름답단다.’하고 말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자존심의 근거입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믿고 아껴주기 때문입니다. 나의 외형이나 성취가 아니라 나의 마음을 보십니다. 항상 같은 사랑으로 나를 기다려 주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그분의 불언지교, 나의 자존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불언지교 예수님, 깊고 고요한 당신에게서 위로와 희망을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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