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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 중헌디?'

종말을 생각하며

코로나19와 기후변화, 자연재해, 생태계의 위기, 곧 지구의 위기로 인류의 종말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언제 어떻게 지구와 우리 삶에 종말이 이를지 알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강력한 태풍, 가뭄이나 폭염, 산불과 지진 등으로 우리 삶이 한순간에 끝날 수 있음을 우리는 어느 때보다 절감하고 있습니다. 


“종말을 생각하라”(집회 28,6). 오늘 1독서 집회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가까워진 종말을 앞두고 우리가 대답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영화 <버킷 리스트>에는, 죽음을 앞둔 두 남자가 그들의 버킷 리스트인 이집트 피라미드를 보면서 대화를 나눕니다. 이집트인들은 죽으면 저승에 가서 두 가지 질문을 받는데 거기에 모두 ‘예’라고 대답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묻는 첫번째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러했습니까? 사실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습니다. 오늘 1독서에도 말합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집회 28,3-5) 


분노와 화를 품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음모고 박해라고 주장하는 그들, 분노와 화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러분 머리속에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들에게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가장 중요한 계명을 말한다고 한들 그들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면서도 도리어 화를 낼 뿐입니다. 그들의 인생에 기쁨이 있는지 묻는 것이 더 이상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집회서는 가르칩니다.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이웃에게 분노하지 말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 그래야 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자신의 죄를 생각하고 용서를 간청한다면 먼저 이웃의 불의를 용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용서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죽으면서 하는 가장 큰 후회는 무엇일까요? 높은 자리에 올라 성공하지 못한 것, 돈을 더 많이 벌어 더 멋진 집이나 자동차를 가지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앞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에게 잘못한 것, 배우자와 자녀에게 준 상처, 싸우고 연락안한 친구, 용서하지 못한 사람,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기쁨보다는 나만의 일, 욕심을 채우려고만 너무 애쓴 것을 가장 후회합니다.  


종말을 생각하십시오. 과연 ‘뭣이 중헌디?’라고 물어보십시오. 기쁨이 없는 인생이라면, 내가 하는 일이 기쁘지 않다면 과연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며 기쁨의 토대입니다.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묻는 두번째 질문입니다. 만일 첫번째 질문에 ‘예’라고 했다면 이 두번째 질문에도 그렇게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했습니까?”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나를 위해 사는 사람,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남을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물건을 이용해야 하지만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은 사람을 이용하고 물건을 사랑합니다.  


우리 가운데 자신이 원해서 태어난 사람이 없듯이 자신이 원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삶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리 말하면, 2독서의 말씀처럼,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로마 14,7).  


신앙이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로마 14,8). 내가 왜 이곳에 태어난 이유를 모르는 것처럼 죽음도 그렇게 올 것이며,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신비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왔습니다. 나는 주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이 아니라 가족, 이웃, 하느님을 위하여 주어진 나의 인생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 내 삶의 의미는 바로 남을 기쁘게 하고, 그들에게 축복이 되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당신이 태어났을 땐 당신만이 울었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날 때엔 당신 혼자 미소짓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울도록 그런 인생을 사십시오.” 


종말을 생각하고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기쁨의 토대입니다. 이웃을 가엾게 여겨 잘못을 눈감아 주는 일은 결국 자신을 위한 길입니다. 우리 모두가 잘못하기 때문입니다. 분노와 화를 가득 채우고서는 기쁘게 살 수 없습니다. 종말을 생각하십시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삶, 때로는 굳이 직접 가서 용서를 청하지 않아도 됩니다. 잘못을 눈감아 주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도 나처럼 죄를 짓는 약한 사람임을 받아들이고 그냥 마음에서 떠나 보내는 것입니다. 분노와 화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는가? 그리고 내 인생은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었는가?’ 스스로 묻고 대답해 보십시오. 영화 버킷 리스트의 마지막 대사처럼 우리 삶도 마지막이 그러하기를 바래봅니다.  


“그가 죽을 때 눈은 감겨지겠지만 마음은 열려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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