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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라는 불공평이 내 인생에 가져다 준 것

지금 우리 사회의 키워드는 ‘공정 혹은 공평’입니다.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자들이 불공정하게 이익을 취하고 불공평하게 혜택을 누리는 것에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말하는 공정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리고 인간이 하는 일에 진정한 의미의 공평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인간은 모두 제각각 다르고 원하는 바도 다른데 어떻게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만족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에제키엘 예언자도 말합니다. “주님의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냐? 오히려 너희의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니냐?”(에제 18,25) 


제 인생, 더 나아가 제가 겪은 시대의 불공평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1997년 IMF가 발생해 하루 아침에 나라가 부도 났습니다. 그해 대학 3학년이던 저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닙니다. 재산과 직장을 잃고 하루 아침에 망해버린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처음에는 우리 잘못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미국 중심의 투기 자본이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우린 무지했고 그래서 고통받았고 저처럼 졸업을 앞둔 젊은이들의 불행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해 변변찮은 일자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들은 불안한 고용으로 이직을 자주 해야 했고, 한창 때에 빚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IMF가 발생한지 이십년이 더 넘었지만 아직도 그때의 충격과 고통은 남아 있습니다. 아무 이유도 모르고, 아무 잘못도 없이 그런 고통을 감당해야 했다면 이것이 진짜 불공평 아닙니까! 


IMF로 인해 저는 중국에 있는 한국 회사에 취업했습니다. 거기서 관리자가 되어 중국 공인들, 주로 값싼 노동력의 십대 소녀들 수백명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한자녀 정책으로 딸이기 때문에 출생신고를 안했고 그래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소녀들, 그래서 임금이 싼 이들이 한달에 받는 봉급은 100달러가 못 되었는데 그것은 왜 불공평이 아닙니까! 그보다 더한 것은 저와 한국인 관리자들이 중국 술집에 가서 하룻 저녁 술을 먹으면 옆에 앉아 시중드는 중국 아가씨에게 주는 팁이 빳빳한 100달러 지폐였습니다. 한달 고빡 공장에서 일하는 소녀의 월급과 술집에서 하룻 저녁 술 따르고 받는 소녀의 팁이 같다면 이런 불공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 사는 일에 공정 혹은 공평을 바라기 이전에 나 자신이 불공정과 불공평의 주인공은 아닌지, 혹은 그것을 묵인하고 있는지는 않는지 먼저 물어봐야 합니다. 저는 중국에서 제가 자본주의의 하수인, 억압과 착취의 시스템 관리자라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저는 죄인이었습니다. IMF가 제게 가르쳐 준 유일하게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왜 사회에서 지탄받는 죄인들, 최하층에 있는 이 사람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죄를 알고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므로 자신에게서 희망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찾고 자신을 구원할 구세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의인은 나쁜 사람입니까, 튼튼한 사람은 죄인입니까? 그들은 구세주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 자기 생각이나 자기 삶을 바꿀 의지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요한이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믿지 않았다”(마태 21,32). 

저는 지금도 죄인입니다. 그러나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IMF라는 시대의 불공평이 제게 준 선물은 재물의 길을 버리고 사제의 길을 걷게 한 것입니다. IMF가 없었더라면 남들처럼 대기업에 취직해서 재물과 성공을 위해 노력하다가 자본주의의 하수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제 생각을 바꾸게 도와 준 것은 IMF였고, 그 불공정이 저에겐 역설적으로 은총이었습니다. 


세상에 공평한 것은 없습니다. 영원한 악이 없듯이 영원히 선한 것도 없습니다. 오늘 좋은 것이 내일 나빠질 수 있고, 오늘 나쁜 것이 내일 좋게 변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의인이 내일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는 죽게 되며, 오늘 악인이 내일 죄악에서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살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합니다. “어떤 성인도 과거가 없는 사람은 없다. 또한 어떤 큰 죄를 지었던 죄인이라도 미래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원수와 같은 그 사람도 다시 한번 선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공평이나 공정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용서받은 죄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와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다른 사람과 친교와 애정과 동정을 나누고 살아갑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이 아니라 겸손으로 하고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깁니다. 자기 것만이 아니라 남의 것도 돌보아 주며 살아갑니다(필리 2,1-4). 


우리가 사는 이유는 이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또 다른 나에게 그리스도가 되는 것,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자녀는 부모에게 부모는 자녀에게 그리스도가 되어주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유입니다. 거기에 공평이나 공정은 필요치 않습니다. 용서받은 죄인에게는 모든 것이 은총이며 다시 베풀어야 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IMF가 터지고 이십년이 더 지난 오늘, 저는 그때의 불공평, 더 나아가 악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섭리를 생각합니다. 그분은 그 길을 통해 저를 다른 길로 부르셨습니다. 죄인이 악에서 돌아와 용서받은 죄인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습니까! 가장 힘든 순간에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가장 절망적인 시간에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은총, 그 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는 그런 순간, 그 순간이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입니다. 때론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힘 역시 이 모든 것, 시련과 고통조차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가장 필요한 것을 예비하기 위한 길임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으로 지금을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더 할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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