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예수님도 틀릴 때가 있다

"미안하다."하고 말하기 어려운 그대에게

예수님도 틀릴 때가 있습니다. 참 하느님이시지만 동시에 참 인간이시기에 문화와 환경, 관습의 영향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나안 부인의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여자가 남자에게, 더욱이 이방인 여자가 유다인 남자에게 말을 걸 수 없는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때문에 성경에서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제는 제자들이 다가와 말합니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가나안 부인은 예수님이 대답도 안하고 무시했지만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었고, 참다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매달립니다. 상황이 이쯤되자,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을 떼 내시려고 충격적인 말을 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여기서 자녀들은 이스라엘 자손이며, 강아지들은 이방인들입니다. 우리 말에도 상스런 말을 할 때 ‘개’라는 말을 붙여서 하는데 그와 같습니다. 


이정도 모욕과 굴욕을 받았으면 쌍욕을 하면서 일어나 저주하고 떠날만한데, 간절한 가나안 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도 틀릴 때가 있습니다. 가나안 부인을 처음에는 이방인 여자 취급했지만 그녀의 끈질긴 청원에 마침내 그 여인이 바라는대로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마음을 바꾸신 것입니다. 하느님도 마음을 바꾸십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에서 믿음 있는 사람이 오십명에서 시작해 열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을 때마다 마음을 바꾸신 하느님, 광야에서 황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모두 쓸어 없애버리려 했을 때 모세의 간청을 듣고 마음을 바꾸신 하느님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십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예수님이 마음을 바꾼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나안 부인의 끈질긴 간청 때문입니다. 무시당하고, 모욕과 굴욕을 겪었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딸을 위해 예수님께 매달린 어머니,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가진 자식에 대한 사랑의 위대한 힘을 보여줍니다.  


얼마전 폭우로 인한 수해 때문에 축사에서 떠내려 가다가 지붕 위에서 사흘을 버틴 소가 극적으로 구출된 적이 있습니다. 구조된 다음날 그 소는 쌍둥이 송아지를 출산했습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살려고 했던 이유는 바로 새끼 때문이었습니다. 짐승도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하느님은 자판기가 아닙니다. 오백원 넣으면 오백원짜리 상품을 내 주는 기계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지혜로운 어머니와 같습니다. 자식이 달라는대로 다 주지 않습니다. 자식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을 꼭 필요한 때에 주십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목숨이라도. 


예수님께서 틀릴 때가 있는 것처럼 우리도 틀릴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 잘 알던 젊은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청년은 애지중지하는 가족과 같은 고양이가 있는데 이 고양이가 많이 아파 밤낮으로 어렵게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저는 만났을 때 고양이의 안부를 물었는데 ‘고양이가 암에 걸렸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고양이도 암에 걸리나요?’ 놀란 듯 하며 웃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나쁜 행동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고양이가 죽을 수도 있어 가슴 아파하는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 제 잘못된 행동에 대해 용서를 청했습니다.  


여러분도 실수합니까? 당연히 하겠지요. 그런데 곧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말합니까? 용서를 청하는 용기가 있습니까? 때로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사람을 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에서 더 자주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친구끼리, 남편은 아내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사제는 신자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다같이 한번 말해 봅시다. “미안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행동을 고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 삶의 수많은 선택의 상황에서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 혹은 자신의 삶의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또는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때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영어로는 ‘What would Jesus do?’ 그 첫자를 따서 ‘WWJD의 법칙’이라고 미국에서는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실수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도 고치셨으니까요. 십자가가 무겁다고 불평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그분이라면 끝내 어떻게 하셨을까 물어보고 조금이라도 그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결심이 중요합니다. 때론 가나안 여인처럼 끈질기게 매달리며, 한마디 대답도 안하고, 무시하고, 모욕하는 것 같은 순간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께서도 틀릴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성모님의 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