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 11,29).
나의 사제 서품 성구
새벽에 잠에서 깼다. 더 이상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날이 밝아올 것이다. 일기를 적었다. ‘자신의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999년 신학교에 합격해 입학을 준비하고 있을 때 ‘대학 졸업식은 꼭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집에서 왔다. 그 당시 나는 신학교 입학을 반대하는 부모님 때문에 가출해 대학 후배 집에 머물고 있었다.
부모님의 마지막 바람이기에 할 수 없이 졸업식에 갔는데 시골에 계시던 할머니가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고 야야(얘야), 니가 결혼을 안 한다 카던데(그렇게 말하던데) 사실이가? 남자는 결혼을 해서 아(아이)를 여럿 낳아야 인간이 되는데 니가 우얄라 카노(어떻게 할려고 그렇게 하느냐)?” 할머니에게 가톨릭 사제가 된다는 것은 독신생활의 문제이고 이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 다음날 신학교에 입학했다.
학부과정 4년을 마친 후 클리브랜드 신학대학원으로 유학을 갔고, 다시 4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2007년 5월 12일 사제 서품식을 앞두고 새벽에 잠에서 깼다. 식은땀이 났다. 이제 몇 시간 후면 한국에서 온 부모님, 미국 전역에서 온 대구대교구 동료 사제들과 지인들 앞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아야 했는데 마음이 불안했다.
비록 클리브랜드 교구 주교님에게서 서품을 받지만 대구대교구 사제가 된다는 것, 전 세계 어디서나 똑같은 서품식 전례가 작은 위로가 되었지만 아마 한국의 동기 신부들은 나를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Made in USA)’라고 놀리겠지. 어쨌든 제대 앞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래서 일기를 펼쳤다.
"내게는 아주 특별한 오랜 친구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 그를 만나고 배우고 알고 믿고 함께 걷기를 어느새 이십 년이 되었다. 그런데 실은 그가 나를 ‘먼저’ 친구 삼았다. 아무 관심도 재미도 능력도 볼품도 없는 내게 먼저 손을 내민 건 그였다. 놀랐고 의심스러웠고 기분 좋았고 흥분했었던 것은 나였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그는 나를 친구로 대하며 가르치고 인내하며 기다려 주었다.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이보다 더 살아있고 멋지고 의미 있는 이름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나를 이끌어 '목자'가 되기를 바랐다. 나는 양 떼를 잘 알지 못하고, 그들을 풀이 있는 곳으로 이끌 수도 없다고 버텨 보았지만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다정다감하면서도 절대 굽히지 않는 무엇이었다. 양 떼를 위하여 웃으며 소리치는 목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와 함께라면, 그가 원한다면, 그가 나의 친구라면, 나는 그 길을 가리라. 나 역시 사랑 때문에 그 길을 걸어보리라. 나의 친구, 예수 그리스도. 나의 친구, 예수 그리스도. 나의 친구, 예수 그리스도!" - 2007 5.12 서품식을 앞둔 새벽녘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 소개를 한다.
난 사제 서품식 전날 한번도 가지 않던 한인 미용실을 찾았다. 미국에 와서 4년 만에 처음이었지만 거금 $25를 내고 머리를 깎아야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금요일인데도 가게 문이 닫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늘 가던 $8짜리 흑인 미용실에 갔다. 자리에 앉으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내일 결혼하는데(사제가 된다는 것은 교회와 결혼하는 것과 같다는 신학적인 의미로) 잘 부탁합니다.’하고 미용사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미용사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큰 소리로 ‘여기 있는 젊은이가 내일 결혼한답니다.’하고 말했고 모두가 손뼉을 치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식은 어디서 하는지’ 묻기에, ‘시내에 있는 주교좌성당’이라고 말하니 놀라는 눈치였다.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사실을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는냐?’고 물어서 ‘대한민국(South Korea)’이라고 말했다.
주교좌성당에서 결혼하고 10,784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신혼여행을 떠난다니! 그렇게 멋진 이발을 하고 나는 2007년 5월 12일 가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이어 그 다음날 성 김대건 안드레아 한인 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나와 신학생 여섯 명, 교수님 한 분이 ‘살아있는 사람 3’으로 클리브랜드 마라톤을 다시 뛰었다. 당시에는 대구대교구 사제연수, 부모님과 지인의 방문, 감사미사 등으로 정신없을 때여서 따로 남긴 기록은 많지 않지만 2006년에 $1,690을 모은 것처럼 2007년에는 $2,400을 모금하여 사라를 위해 마다가스카로 보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랑의 선교회 엠마누엘 수사님께서 답장을 보내왔다.
“Yes! 살아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천 명이나 되는 우리 어린이들과 홈리스들을 위해 무엇인가 하려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기쁩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5일을 밥을 나누어 주는데 1톤의 쌀을 사도 2주가 지나면 떨어집니다. 참고로 1톤의 쌀을 사는데 600달러가 듭니다......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여러분의 레이스가 성공적이길 기도합니다.”
사제 서품 후, 클리브랜드 교구에 있는 성 안토니오(St. Anthony) 성당의 보좌신부로 발령을 받았다.
성 안토니오 성당에는 폴란드에서 이민 와서 살기 시작한 나이 든 어르신들이 많았다. 하루는 미사를 마치고 신자들에게 인사하는데 할머니 한 분이 내게 다가오셨다. 그분은 망설임 없이 내 볼을 꼬집으며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먹고 싶을 만큼 귀엽네!(I can eat you up)” 태어나서 처음 본 동양인 신부가 얼마나 어리고 귀엽게 보였을까.
미국의 조용한 도시에서 한국인 사제로 살아가는 일은 평범했다.
아침 7시에 아침 미사를 봉헌하고 오전 9시에 초등학교 어린이들과 함께 미사를 바친다. 미사 후에는 복사단 교육 또는 종교 수업을 하고 사무를 보다가 간단한 점심을 먹는다. 오후 1시에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2시에는 병원에 있는 환자 방문을 간다. 돌아와서는 면담, 강론과 교리 준비를 하다가 저녁을 먹는다. 저녁식사 중에 신자 한 분이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와서 장례식장에 가서 고인을 위한 기도를 바친다. 그렇게 하루를 마치고 방에 들어오니 저녁 9시다.
나이 드신 분이 많은 본당이라 장례미사가 많았다. 한번은 주임신부님께서 일주일 휴가를 떠나셨는데 기다렸다는듯이 여섯 분이 차례로 돌아가셨다. 보통 미국에서 장례가 나면 사제가 장례식장에 가서 기도를 바치고 유족들과 장례미사 준비를 상의한다. 그리고 다음날 장례미사를 바치고 동네에 있는 무덤으로 함께 가 마지막 기도를 바친다. 여섯 분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매일 오전에 장례미사를 바치고 묘지에 가서 한 분을 묻고 돌아서서 다시 장례식장에 가니 나중에는 어떤 분을 떠나보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렇게 일년 동안 돌아가신 분이 백명이 넘었다.
본당 초등학교 8학년 학생들에게 종교 수업 시간에 사라와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랬더니 네 명의 학생-크리스틴, 브리지트, 니콜, 킴벌리-이 함께 뛰고 싶다고 했다. 이들 외에 학부모 토미, 유학 중인 한국 청년 염민규 토마스 아퀴나스가 2008년 ‘살아있는 사람 4’가 되어 클리브랜드 마라톤에 참가했다. 함께 학교를 뛰거나 자전거를 타며 대회 준비를 했다. 그들은 모두 마다가스카의 사라를 기억하며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10킬로미터 마라톤을 준비했다.
마라톤을 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풀코스 마라톤 완주를 하는 그날부터 꿈을 꾸게 된다. 다음 대회에서 기록을 좀 더 단축시키고 싶은 것에서부터 유명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것, 그리고 마침내 아마추어 마라토너의 꿈인 3시간 내에 풀코스를 완주하는 서브 쓰리(Sub-three)를 꿈꾸게 된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의 꿈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마라톤,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 참가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나이대별로 공식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 당시 내 나이대 18-34세 그룹은 3:10이었으니 클리브랜드 마라톤 대회에서 3시간 10분 내에 풀코스를 완주해야 보스턴 마라톤을 뛸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2020년 기준으로 18~34세 남자 그룹이 보스턴 마라톤 참가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기록은 3:00(여자 3:30), 35~39세 그룹은 3:05(여자 3:35), 그리고 40~44세 그룹은 3:10(여자 3:40)으로 단축되었다.)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본당 초등학생들도 함께 했기에 열심히 준비했다. 본당 옆 고등학교 트랙을 뛰면서 스피드를 연마했고 주말이면 장거리 달리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마침내 대회 날이 왔다.
또 비가 내렸다. 모자를 쓰고 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계획했던 페이스를 유지하며 마의 32킬로미터의 벽도 무사히 넘겼고 호수바람의 저항도 이겨냈다. 하지만 마지막 5킬로미터를 남겨두고 페이스가 떨어졌고 목표했던 3시간 10분 내에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10킬로미터를 뛰고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을 본당 학생들 얼굴을 생각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래서 마지막 3킬로미터는 전력 질주를 했고 3:14:03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최선을 다했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뛰면서 내내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생각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present)가 선물(present)이듯이 우리의 인생 역시 그러할 것이다.
클리브랜드 마라톤을 마치고 며칠 뒤에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2008년 8월이면 내 나이가 만 35세가 되는데 그 때문에 2009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참가신청을 할 때 나는 35-39세 그룹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새 그룹의 보스턴 마라톤 대회 참가 자격을 얻는 공식 기록은 3시간 15분이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기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보스턴에 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