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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계 사유원을 소요하다

낯선 수목원 탐방기

군위 부계면 치산효령로를 따라 운전하다보면 이상한 건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까이에는 노란 카페 '몽몽마방'이고 산 위에 우뚝 솟은 잠망경 같은 건물은 전망대인 '소대'다. 상주영천고속도로에서도 '소요헌'이 보이기에 궁금증을 자아낸다는 이곳은 '사유원(思惟園)'이다.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담은 사유원, 오래전부터 부계공소 신자들로부터, <묵상-건축가 승효상의 수도원의 순례>를 통해 들어본 적이 있는 곳으로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설립자 유재상 씨는 태창철강 사장이며 김익진 프란치스코 선생의 막내 사위로 내년 5월 정식 개장을 앞두고, 조환길 대주교님과 지역 기관장들을 초대했는데 군위본당 신부가 덤으로 가게 되었다.


창평저수지에서 바라본 사유원 입구와 소대


사유원 입구 '치허문'을 지나면서 나를 온전히 비우고 내 안의 숲에서 나를 마주하기 시작했다. 아주 낯선,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사색하는 수목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바람, 눈, 비를 맞으며 어언 천년'이란 뜻의 '풍설기천년'에 이르니 108그루의 300년 이상 된 모과나무들이 장관을 이루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300년이라니, 그 가운데에는 600년 된 모과나무도 있었다. 그 아래에서 떨어진 모과를 하나 주워 냄새를 맡으니 알싸한 모과향만이 아니라 씁쓸한 세월의 맛도 났다. (아래 몽몽마방에서 대접받은 모과차가 바로 여기서 난 것이라 한다.)


600년 된 모과나무와 풍설기천년


모과나무 108그루의 이웃은 수령 200년 이상 된 배롱나무 천지인 '별유동천'이었다.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별천지를 만들어 무릉도원을 연상하게 할 만한 곳이었다. 배롱나무의 새하얀 자태는 나무로서의 물성을 다 태우고 난 신천지의 정원수처럼 단아했다.


별유동천에서 바라본 팔공산 정상


이렇게 놀라운 자연의 진면목 가운데 보석같은 건축물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건축가 승효상이 가장 기세 좋은 곳에 세운 '현암'은 말 그대로 오묘하고 아름다운 집이었다. 지붕에 올라서니 타이타닉의 뱃머리에서 팔을 펼치고 선 듯 했고, 아래 집으로 들어가니 나무와 다다미 바닥과 유리로 사방이 트여져 있어 아늑하면서도 펼쳐진 경관이 놀라웠다. 한 겨울밤 그곳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팔공산을 바라본다면 자연에 대한 경외심 뿐만 아니라 신에 대한 감정이 더 두터워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현암의 오묘한 여백의 공간에서


'현암'이 나왔으니 사유원의 대표 건축물 '명정'을 이야기 해야겠다.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으로 이승과 저승을 한 공간에 담아냈다. 의자가 있는 이쪽에서 물가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저승, 놀라운 붉은 빛이 감도는 곳으로 간다. 물이 흘러내리는 벽면은 신비감을 더하고, 그 아래에는 혼자서 기도하는 작은 공간이 있다. 가톨릭에서 '건너가다'라는 뜻의 '파스카'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감인 것처럼, 살아서 기도하면서 빛을 누리다가 때가 되면 누구나 건너가야 한다. 


이승에서 바라본 저승, 그리고 둘을 연결하는 다리


건물 사이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날카로운 빛이 눈을 부시게 하더니 이내 온 세상이 다시 정원처럼 펼쳐졌다. '천국가는 길'이라 한다. 그러고보니 명정은 땅 속에 있었고 거기에는 살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명정 위에 오르고서야 부활한 뒤에 펼쳐진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명정 위에서 바라본 팔공산 


천국가는 길을 오르는 한 사람


사유원의 놀라운 언덕인 '경전'에 올라 풍설기천년을 바라보며 연회가 펼쳐지는 장면, 꾀꼬리 극장인 '앵전'에서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는 것을 상상해 본다. 베토벤 탄생 250주년 기념하여 '전원 교향곡'을 꼭 연주하고 싶었다는 그곳에서 해질녘 살랑거리는 바람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연주를 듣는 것 같았다. 기회가 된다면 어느 여름밤 앵전 잔디밭에 앉아 비발디의 '사계'를 꼭 듣고 싶었다.


앵전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본 수상무대


가장 우리다운 한국 전통 정원인 '유원'에 이르자 익숙함, 편안함, 따듯함이 느껴졌다. 설립자의 호를 딴 '사야정'에 앉아서 바라보니 우리 산하가 가진 고즈넉함과 넉넉함이 느껴지는 경관이 펼쳐졌다. 시간이 있다면 차를 꼭 한잔하고 싶은 곳이다.


이제 가장 놀라운 건축물을 이야기해야겠다. 포르투칼의 건축가 알바로 시자(Alvaro Siza)가 지은 '내심낙원'이 그 첫번째다. 야인 김익진 프란치스코와 사제 찰스 매우스 추모하는 경당으로 막내 사위 유재성 씨의 마음이 담겨 있는 곳이다. 추모당을 짓고 한 그의 인사말이다. 


그러면 장인께서는 제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시며 말씀하시겠지요. "유 서방! 치장을 없애고 본질에 충실해야 해! 그게 최고의 아름다움이고 최상의 품격이라네. 단순함은 본질이라네. 유 서방은 그것을 깨달아야 세상의 진실이 보이게 될꺼네. 르꼬르 뷔지에 말처럼."


눈 속에 내심낙원 @google.com


그 다음은 장자의 '소요유'에서 이름을 가져 온 알바로 시자의 건축물 '소요헌'이다.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다니는 집이라 했지만 집 안으로 걸어가는 길이 방공호로 들어가는 길 같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 앞에 전쟁과 공포, 죽음의 거대한 철제 조각이 드러났다. 하지만 다른 길로 들어서니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생명의 탄생과 같은 큰 알이 있었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새로운 세상은 눈부시게 빛났다. 제비가 건물 천장에 집을 틀어 새끼 제비가 비행연습을 한다는 곳, 건축물에 이끼가 끼어 점점 물건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간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소요헌 정경 @google.com


설립자 유재성 씨는 이곳에 두 분의 음악가를 초청했다. 소프라노 이윤경 씨가 피아니스트 박선민 씨의 반주에 맞춰 심봉석 시 '얼굴'을 불렀다. 죽음과 삶의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소프라노의 가곡은 빛과 어둠, 안과 밖, 자연과 인공, 마침내 생과 사를 넘어서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건축물의 안과 밖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노래하는 소프라노의 자연스러움과 색다른 울림은 장자가 추구한 절대적인 미, 소요 그 자체였다.


소요헌 안에서 이루어진 작은 음악회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한가로이 노닐며 시의 감정이 생긴다는 느티나무 숲 '한유시경'을 지나 마지막 장소에 다다랐다. 깊은 생각을 담은 연못이라는 뜻의 '사담'은 맑은 물을 품고 있어 사유원 모든 동물들의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한다. 그동안 메말랐던 내 영혼도 사유의 숲을 거닐며 미소와 감동으로 그렇게 채워진 것 같았다. 


가을날 오후, 사유원에서 소요하며 보낸 한나절이 꿈만 같은데 노을은 잔잔하고 와인향은 진했다.


사담에 해가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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