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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신부가 신자들에게 띄우는 가을 편지

처음 군위본당에 왔던 2018년 1월이 생각납니다. 지치고 상처받고 그래서 쉼과 위로가 필요했던 저였습니다. 오랫동안 그림자처럼 살다보니 자신을 잃어 버렸고 점점 심장이 식어 차가운 사제로 영혼이 메마른 상태였습니다.  


본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갈라지고 미워하고 마음을 닫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날카롭고 거친 말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고, 배신감마저 느낀다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는, 그래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그해 겨울이 정말 춥게 느껴졌습니다. 


조용히 함께 사는 법을 연습했습니다. 흩어진 것을 줍고, 무너진 곳을 세우고, 부서진 곳을 고치며 상처입은 것이 치유되기를 바라며 매일 기도하며 걸었습니다.  


울퉁불퉁하던 신자들의 마음은 마치 교회쪽 성당 입구에 있던 콘크리트 턱과 같아 지나다닐 때마다 몸과 마음을 덜컹거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계절이 바뀌고 아스팔트로 길이 새로 포장되자 조금씩 살로 된 마음이 돋아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같이 산다는 건 만나면 어느때나 ‘식사 하셨어요?’하고 인사하는 일상의 일인 것 같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시간을 두고 얼굴을 맞대고 살다보면 생겨나는 유대와 공감이 저를 이 자리에 천천히 뿌리내리게 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신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를 살게 하고 자라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주신 사랑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기억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달에 한번, 혹은 두달에 한번 봉성체 때 만났던 소보의 마리아 할머니, 제가 가면 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으며 ‘어찌 이리 참하노!’하며 아껴주셨지요. 제 꿈을 꾼다는 마리아 할머니를 뵈면 내리 사랑에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그 사랑이 고맙고 그립습니다. 


사랑이란 결국 자신을 내어주는만큼 자신에게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만을 위해 살아왔던 제가 군위성당에 와서 제 욕심을 내려놓고 내어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살이 찌고 피가 돌아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6킬로 넘게 쪘습니다!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하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복음의 기쁨이란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다!’는 것을 제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 좋은 가을, 함께 있음이 ‘참 좋다.’하고 말하며, 앞으로 주님 안에 충실히 머문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음을 바라보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9월 27일 본당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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