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감각은 나의 세계를 확장시킨다
한 사람이 평소에 하는 일을 크게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본질적인 일에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의식주 생활과 이를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경제활동 중 본업을 포함시키면, 보건지소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고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은 대개 비본질적이라 할 수 있다. 하루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24시간이 주어지고 그 중에 가장 필수적이고 근본적인 일에만 천착해도 관심분야에서 성장하기란 여간 힘든게 아니다. 버티는 삶을 살기에도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한 세상이다. 오죽하면 고통없는 혁신과 성장은 없다는 말이 나오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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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 갖고 매일같이 하고 있는 일들에 관해 나름의 변을 하고 싶다. 이것들은 나의 감각을 끄집어내고 키우는 활동이다. 다양한 음식은 맛의 감각을, 운동은 몸의 감각을, 사진은 빛과 색에 대한 감각을, 장르를 망라한 읽기와 글쓰기는 언어의 '아 다르고 어 다른' 감각을, 음악은 서로 다른 음과 음색들 사이의 차이와 조화 그리고 변주에 대한 감각을, 영화는 스토리와 다른 세계관에 대한 감각을, 여행은 낯선 곳에서 쉬이 타자가 되는 느낌과 다른 문화와 넓은 세계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준다. 이 모든 것들은 언뜻 보기엔 비본질적이지만 사실 모든 요소들이 각자의 삶을 구성한단 점에서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고, 고로 이것들은 모두 본질적이다.
다시 힘주어 말하면, 나는 내 '생의 감각'을 키우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다. 공감 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내겐 미묘한 차이를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이런 활동들이 특히 중요하다. 경험을 통해 체득하는 이런 감각들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물론 돈으로 시간을 사서 효율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단 점에선 돈으로 살 수 있다고도 하겠지만, 경험한다고 해서 모든 이가 뭔갈 느끼는 것은 아니므로 그건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다. ㅤㅤ
굳이 이 '감각'을 끄집어 내어 얘기하는 이유는-결국 사람은 본인이 감각하는 수준까지만 대상을 자기 세계로 편입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듣질 못하는데 그게 어떻게 내 세계의 일이 되겠나. 그렇게 세상의 많은 것들이 '내 세계 밖의 일', '남의 일'이 된다. 감수성 부족이 비단 감성의 부족만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차라리 이건 불감증에 가깝다.
물론 세상의 모든 일과 사건에 관심을 가지며 사는 삶을 찬양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더 나은 이해가 반드시 행복한 삶을 보장한단 얘기도 아니다. 그저 사람에 대한 어느 정도 수준의 이해는 보다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단 것 뿐이다. 그게 내게 슬픔을 가져다주든, 기쁨을 불러다주든 말이다.
본질과 비본질을 전문성과 소득을 기준으로 분류해놓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본질적이라 말하는 모습이 참 모순적이다. 아무래도 내가 나를 지키고 싶었나보다 싶다. 모순적인 모습을 자각하면서도 글로 옮긴 이유는 지난 8월 러닝을 시작하고 내가 취하는 자세에 따라 몸의 어느 부위에 자극이 오는지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내 몸의 감각을 키워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맴돌던 얘길 부득불 쓰게 된 건 계속되는 문서작업 중에 내 본업은 과연 무엇인가, 내 본업에 관한 현실 감각은 언제 키우나, 그 현실은 남이 생각하는 현실인가, 아니면 비전 혹은 망상을 뭉뚱그려 생각하는 나의 가상 현실인가, 나는 자기실현을 위한 이성이 부족한가, 생각하다 생각이 넘쳐 쓰지 않을 수 없었던 탓이다. 더욱이 지인에게 추천받아 읽은 <신경 끄기의 기술> 이 이런 생각을 증폭시키는데 한 몫했다.
여튼 모두들 각자의 고유한 감각을 잘 살렸으면 좋겠다. 일단 나부터 잘 좀 살려서 무뎌지지 말아야지. 각자의 자리에서 감각을 살린 한 주를 다시금 잘 맞이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