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우정
"이번 현장학습 1반 보조교사로 샘이 간다며?"
"네? 정해졌어요?"
"쌤이랑 얘기된 거 아니었어?"
"저한테 아무 말씀 없으셨어요."
"주형 샘이 샘 간다 하더라고."
"아니, 전 수업도 안 들어가는 반인데..."
"그렇네."
재희의 말을 들은 희유는 기가 막혔다. 누구 마음대로 내가 그 반 현장학습 보조교사로 간단 말인가. 한마디 의논도 없이 정해질 수는 없다.
"부장님"
"응?"
"이번 현장학습 제가 1반 보조교사인가요?"
"아 그잖아도 얘기하려고 그랬는데. 보조교사가 아니라 우리 반 좀 맡아 줘."
"네?"
갈수록 태산이다. 주형은 장학사 시험이 코앞이라 학교 차원에서 배려를 받는 상황이었다. 시험을 앞두고 현장학습 인솔이 무리라 희유에게 반을 맡길 심사였다. 희유는 책임감이 강하고 야무져서 신뢰가 갔다. 희유 입장에선 횡포다. 보자 보자 하니 사람을 보자기로 보는구나. 주형에 대한 실망감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희유 샘, 사람이 그렇게 착하면 안 돼."
"저 안 착해요."
"나 아니었음 시수 몰빵 받을 거였잖아."
"아... 막내니까요."
"막내는 무슨. 나이도 많으면서."
"흐흐 그래도 젤 늦게 들어왔으니 막내죠. 아무튼 오늘 감사합니다."
국어과 협의회에서 희유는 두 개 학년에 18 시수를 맡을 뻔했다. 초임인 희유는 많이 공부하고 배워야 하기에 학년을 걸쳐서 수업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대부분 국어 교사들의 의견이었다. 희유는 그러겠노라 수긍하려 했다. 지금은 뭐든지 주는 대로 받을 처지라고 생각했다.
주형이 불합리함을 지적했다. 초임이 두 개 학년 수업을 꼼꼼히 준비하는 것은 무리라고 동료들을 설득했다. 다시 학년을 나눠 희유가 한 학년 네 반, 16 시수를 받았다. 주형은 모두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희유가 안쓰러웠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주눅 들게 한단 말인가.
주형과 이야기를 나누고 수업에 다녀온 희유 자리에 초콜릿과 커피가 놓여 있었다. 그냥 봐도 주형이 놓은 것임을 알아챘다. 지금 이 정도의 친분은 주형뿐이었던 것이다.
[부장님, 초콜릿과 커피 감사합니다.]
[난 줄 어떻게 알았어? 당 충전해서 거절할 수 있는 용기 키워요.]
[네, 고맙습니다.]
희유는 메시지를 빤히 들여다봤다. 주형은 정말 멋있는 선배 교사였다. 갑자기 세상을 떠난 오빠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주형의 외모도 오빠랑 비슷한 느낌이다. 오빠는 희유가 아프거나 힘들 때 희유에게 그녀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사다 줬었더랬다. 희유는 잠시 오빠 생각에 뭉클해지면서 주형에게 생기는 감정을 경계했다. 주형은 참 친절한 사람이구나.
부정적인 마음이 한 번 생기면 좋은 기억은 그 마음에 잡아 먹히고 만다.
"부장님, 저 현장학습 인솔 못합니다."
"왜? 지금 나 시험이 코앞이라 교감선생님께서 승인해 주신 상황이에요."
"제가 수업하는 반도 아니고 아이들을 모르는데 어떻게 인솔을 해요?"
"그잖아도 이번 주부터 재량 시간에 샘 들어간다고 안내해 놨어. 그때 얼굴 익히면 되지."
"그냥 보조도 아니고 그걸로 안 돼요. 저 제가 수업 들어가는 7반 보조 이 선생님하고 바꾸겠습니다. 이 선생님은 1반 수업도 하시니까요."
"이 선생님도 인솔 어렵다해서."
"아니 이 선생님도 못하시는 걸 제가 어떻게 해요?"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동 교과 좋다는 게 뭔가? 이럴 때 못 도와줘?"
"할 수 있는 거면 기꺼이 하죠. 저 깁스하고 시험문제 편집도 했어요. 그런데 이건 안 돼요. 아이들 안전이 걸린 문제입니다. 아무튼 저, 인솔교사 못합니다. 사람 다시 정하세요. 정 어려우시면 보조로 들어가겠습니다."
희유는 꾸벅 인사하고 교무실 문을 닫고 나왔다. 주형은 생각지도 못한 희유의 거절에 잠시 아득해졌다. 희유가 당연히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자기 생각을 따박따박 잘 말하는 줄 처음 알았다.
'왜 작년에 떨어져서 이 사달을 낼까.'
희유는 주형이 못마땅하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고 그래서 희유도 주형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최선을 다해 동 교과 부장 교사인 주형을 깍듯이 대하며 시키는 일을 해 왔었다. 그렇지만 수업도 안 들어가는 반의 현장학습 인솔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바탕 소동이 있고 나서 주형은 결국 본인 반 현장학습을 인솔하였다. 이 학교는 학교 특색 사업으로 반 학생들이 가장 원하는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3박 4일 현장학습을 간다. 주형네 1반은 일본으로 갔고 비담임인 희유는 7반 제주도 보조로 따라갔다.
3박 4일 정신없이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희유는 문득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주형 반 인솔을 거절한 후부터 둘 사이는 예전 같지 않았다. 이번 현장학습 기간에도 서로 단 한 통의 메시지도 주고받지 않았다. 안부를 묻던 사이였었는데 그마저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직장 내 우정이 얼마나 하찮은가를 생각하며 희유는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