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 거리
"고생 많으셨습니다. 먼저 갈게요."
"선생님, 맥주 한 잔 안 하고?"
"네."
실망한 얼굴의 주형을 희유는 그냥 지나쳤다. 맥주는 얼어 죽을. 이렇게 멀어짐을 선택했다. 직장에서 친구를 꿈꿔선 안 된다.
희유는 그토록 원하던 사립학교 입사에 성공했다. 이제 더 방황할 일은 없을 듯했다. 온 가족의 축하를 받으며 교직 생활을 재개했다.
주형은 희유의 동 교과 부장이었다. 희유가 입사한 이후로 쭉 같은 학년 수업을 했다. 주형은 희유를 잘 끌어줬고 그런 주형이 희유도 좋았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세심하게 배려해 주는 그가, 여자였으면 참 좋았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랬다면 정말 좋은 친구가 됐을 텐데.
희유가 대리를 불러 돌아가는 길에 잠깐 잠이 들었다. 그러다 시계를 보려고 핸드폰을 꺼냈더니 부재중이 세 통이 찍혀 있다. 주형이었다. 잠깐 멈칫하는 사이, 다시 전화가 온다.
"여보세요."
"아니, 왜케 전화를 안 받아?"
"무음이라 몰랐어요."
"아휴, 놀랬잖아. 잘 가고 있어요?"
"네, 다 왔어요. 이제 주차장이에요."
"다행이네. 잘 쉬고, 내일 봐요."
"네, 부장님도요."
지금, 나 걱정돼서 전화한 거였어? 생각해 보니 회식 때마다 주형이 희유의 도착을 확인했었다. 희유는 기분이 묘해짐을 느꼈다. 결혼 이후, 남편이 아닌 다른 이성으로부터 안부를 확인받는 게 처음이었다.
희유의 안부를 확인하고 나서야 주형은 차에서 내렸다. 늦은 밤, 여교사를 대리로 가게 하는 건 역시 불안한 일이다.
주형은 늘 희유에게 마음이 쓰였다. 희유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주형의 여동생과 꼭 닮았다. 외모와 성격까지. 그녀가 처음 입사한 순간부터 주형은 눈을 의심했다. 실제 학교 선생님들이나 학생들도 주형과 희유가 닮았다고 할 정도였다.
"희유 샘은 명절 쇠러 어디로 가?"
"아, 서울이요."
"멀지 않네. 서울 어디?"
"서초동이요."
"시댁이 서초동이었어? 친정은?"
"역삼동이요."
"완전 부자였네?"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
주형은 희유에게 뜬금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지독히도 가난하게 큰 주형이었다. 이 악물고 공부해서 교사가 되었고 집안 좋은 아내를 만나서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됐다. 그런데 동생 주희는 안정을 경험하지 못한 채 고생만 하다가 공장에서 사고로 갑자기 목숨을 잃었다.
동생의 목숨값이 주형의 결혼자금이었다. 주형은 그 부채 의식이 늘 마음 한 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시험 문제 편집 가능하지?"
"네? 지난번에 제가 했는데."
"내가 장학사 시험이 얼마 안 남아서. 부탁할게."
"아, 네."
왼손을 다친 희유였다. '이 사람 진짜 왜 이래. ' 이제 막 깁스를 하고 퇴원한 사람에게 시험문제 편집이라니.
언제부턴가 주형에게서 찬바람이 분다. 희유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강사 구할 걱정만 하던 주형이었다. '그게 내가 강남 사람이기 때문은 아니길.' 희유는 바라 본다. 그간의 친절이, 없어 보였던 연민과 동정이었다면, 너무 비참할 듯하다.
한 손으로 시험문제 편집을 마쳤다. 주형은 고맙다고 한마디 할 뿐이다. 희유도 같이 찬바람을 내기로 했다. 어떤 개인적인 친분도 갖지 말자 다짐했다.
희유를 알면 알수록 희유는 그냥 희유였다. 구김살 없고 넉넉하여 순수하게 세상을 보는 사모님일 뿐이었다. 어떻게 그녀가 주희로 보였을까. 주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항상 밝고 주변에 사람이 많은 희유가 주형은 부러웠다. 그녀에겐 악착같음이나 거절이 없다. 그래서 무엇이든 시키기 좋다. 주형은 그렇게 희유가 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