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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영 Mar 09. 2024

위로 역량

마음을 표현하는 법

선생님


카톡이 울리고 A 선생님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부르는 말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인생에서 슬픈 예감은 대체로 틀리지 않는다. A 선생님의 어머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부고였다.


내가 약간의 오한과 몸살, 목감기 증상으로 쉬고 있던 주말이었다.


"여보, 나 조문으로 광주를 가 봐야 할 거 같은데 어떤 방법이 있을까."

"버스 타고 가. 운전하지 마."

"응? 진짜? 운전하고 싶은데."

"맘대로 해. 근데 힘들걸?"


장거리 운전을 많이 안 해 봐서 겁이 없나. 감이 안 잡힌다. 왕복 7시간 거리. 흠. 고민하고 있을 때 다른 동료 선생님께 메시지가 왔다.


"선생님 조문 가시죠? 같이 기차 타요~"


전화를 드렸더니 KTX를 타면 된단다. 오호, 좋다. 나는 친한 선생님 두 분과 KTX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다.





태어나서 처음 가 보는 곳이다. 밤이었고 관광이 아니어서 어떤 감흥도 없었지만, 역에서 내리자마자


"야, 남쪽이라고 그래도 공기가 따뜻하다잉~"


전라도가 고향이라는 동행자 B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사투리에 크게 웃었다.


"어머, 놀래라. 나 부르는 줄!"

"감탄사, 감탄사 ㅎㅎ"


우리 셋은 한바탕 웃으며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에 갔다.


도착해서는 마음이 확 무거워졌다. 다시 오한이 시작되고 힘이 빠지고 목이 멘다. 장례식의 무겁게 가라앉은 슬픈 분위기가 나를 짓누른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겠지만 장례식에 오면 입구서부터 덜덜 떨린다.


꽃 한 송이를 올려두고 마음을 다해 기도했다. 사진 속 고인은 나의 친한 동료 A 선생님과 닮아 있었다. 더 마음이 아팠다.  가시는 길 평안하시기를, 하늘에서 영혼을 잘 받아주시기를, 남은 가족들이 너무 오래 슬프지 않기를, 하늘의 위로가 가득하기를 기도드렸다.


사람의 말은 한계가 있다. 어떤 말이 위로가 될까. 그냥 묵묵히 들어줌으로써, 건네는 술 한 잔 받음으로써, 짧게 얼굴 봄으로써 나의 위로를 다했다고 하기가 미안했다. 끊어 놓은 열차 시간에 쫓기어 오래 있지도 못하고 넉넉하지 못하여 두둑한 부의금으로 마음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그냥 짧은 시간 앉아서 육개장 한 그릇 먹으며 그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미안했다. 그 슬픔의 크기를 알 것 같아서, 그 허망함을 느낄 수 있을 거 같아서. 위로 역량이 부족한 내가, 너무 미안했다.






오빠를 보낼 때 나는 울지 못했다. 울 수 없었다. 아니, 오빠를 보러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부고를 듣고 펑펑 울었다. 남편은 운전 중이었고 아이는 자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고, 오빠의 절친이자 나의 또 다른 오빠였던 J가 단호하게 말했다.


"야속해하지 말고 잘 들어. 네가 정신 똑바로 잡고 있어야 해. 울면 안 돼."

"으응"


차에서 펑펑 울고 병실에 올라가서 그림처럼 누워있는 오빠를 봤다. 울지 않았다. 아직 온기가 있었다. 온기가 있는데 세상을 떠났단다. 울 수 없었다. 엄마가 혼절 직전이었고 남편 품에 안겨 있던 내 아이는 어렸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울 수 없었다. 나는 나의 친구들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위로를 받으면 무너질 거 같았다. 나의 어린아이를 시부모님께 보냈고 나는 엄마 아빠를 챙기며 새언니를 돕겠다는 생각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었다. 남편이 함께해 주어서 너무나 든든했다. 오빠와 나는 한 교회에 다녔던, 그래서 겹치는 친구들이 많은 사이였다. 오빠의 지인이 나의 지인이었다. 내가 의지하는 한 분이 오셨을 때 나는 무너질 뻔했다. 사실 그분을 기다리고 기다렸었다. 나는 참았던 눈물을 또 꾹꾹 누르며


"왜 이제 오셨어요."


투정 한마디 했으나 그분 품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오빠의 지인이자 나의 지인이었던 많은 분들이 삼일 내내 꼬박 찾아와 주었고 또 많은 분들이 발인까지 함께해 주었다. 그렇게 위로가 됐고 감사했고 든든했다. 덕분에 나는 마지막까지, 무너지는 엄마의 절규와 시뻘게져 짓무른 눈으로 소리 없이 우시던 아빠 곁에서 이를 꽉 물고 정신줄 똑바로 잡고 있을 수 있었다. 울지 않았다.


울지 않았다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슬펐다. 내게 오빠는 세상이었다. 그랬던 오빠가 갑자기 떠났다. 이 꽉 물고 버티는 나에게 모든 가족이, 네가 잘해야 한다, 네가 부모님 챙겨야 한다, 네가 엄마아빠 잘 보살펴 드려야 한다, 네가 정신 차려야 한다, 이제는 네가 해야 한다, 엄마가 어떠시겠니, 너도 엄마라서 엄마아빠 마음 알지 않겠니, 네가 엄마 위로 잘해드려라.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말을 했었다. 들으면서 서운하진 않았다.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내 내 곁을 지키던 한 친구가 말했다.


"너도 슬프잖아. 너도 위로받아야지. 왜 아무도 널 위로하지 않아?"

"지금 내가 위로받을 처지가 아니지."


남겨진 부모님, 새언니, 그리고 너무도 어렸던 조카들. 위로가 내게까지 오기엔 힘이 약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솔직히 나도 너무 슬펐고 위로가 필요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장례식에 가면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다. 건강을 챙기라는 말도, 힘내라는 말도, 정신줄 잡고 있어야 한다는 말도. 그냥 펑펑 우세요. 소리도. 모두가 뭣도 모르고 하는 소리 같아서, 조심스럽다. 상대의 무너진 마음을 살피는 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게 무력하기만 하다. 눈물이 글썽거려지는 것도 나의 상황이 겹쳐진 것은 아닌지, 그걸 진정한 위로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감정이 이입된 슬픔이 오롯이 그 사람을 위한 슬픔일까. 나는, 슬픔과 위로에, 그렇게나 자신 없는 사람이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오는데 A 선생님 아들이 우리가 가는 게 서운한지, 이 상황이 힘들어서인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 모습이 또 너무 짠해서 등을 쓸어 주며,


"아이고, 00아 울지 마."


하는데 동행한 C 선생님이,


"아니야. 00아. 울고 싶을 때 많이 울어. 괜찮아."


하신다. 맞다. 저게 진정한 위로지. 나는 또 초라해진다. 아이 마음 하나 토닥여주지 못하는 서툰 사람이다. 무거운 마음과 발걸음으로 인사를 전하고 다시 먼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남일 같지가 않아 마음이 무겁다고 우리는 얘기한다. 연로하신 부모님 생각에, 갑작스럽게 닥칠지도 모르는 이별에 관해 말하며 무거운 마음을 토로한다. 그래도 우리는 올라가는 기차에서 조용조용 수다도 떨고 커피도 마시며 꽤 괜찮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내가 위로받았다. 슬픔을 나눌 수 있는 동료들에게서. 멀리까지 한달음에 함께 갈 수 있는 동료가 있음에 감사했다.


어둠 속을 달리며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은 표현하기가 어려워 읽기도 어려운가 보다. 그래도 진심은 전해질 거라 생각했다. 돌아오면서 이상하리만치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  위로를 드리러 가서 위로를 받고 온 기분이다. 마음은 나눌수록 좋다.


하루를 넘어선 여정을 마치고 간절히 기도 드렸다. 너무 많이 슬프지 않기를. 내가 못한 위로를 하나님께서 해 주시길. 나의 위로역량은 이렇게나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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