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여성 천문학자
현대 천문학과 나아가서는 우주론에서 중요한 인물중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헨리에타 리비트를 들 수 있을것입니다. 헨리에타 리비트의 발견은 우리 은하만이 우리 우주의 전부가 아니라는것을 확인시켰으며 더 나아가서는 유명한 허블법칙을 발견할수 있게 했죠.
헨리에타 스완 리비트는 1868년 미국 메사츄세츠주의 랭카스터에서 태어났습니다. 리비트의 아버지는 목사였죠. 그녀는 일곱자녀중 장녀로 태어났으며 어린시절 교육을 매우 잘 받았습니다.
1885년 클리블랜드로 이사간뒤 리비트는 오벌린 칼리지에 입학해서 이곳에서 졸업합니다. 그리고 1888년 레드클리프트에 입학에서 1892년 졸업했죠.
리비트는 레드클리프트에서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으며 이때 천문학도 공부하게 됩니다. 그녀는 이때문에 하버드 대학 천문대의 작업도 잘 알았을것입니다.
졸업후 리비트는 처음에는 하버드대학 천문대에서 무급으로 일을 했었습니다. 자원봉사형식으로 일을 도왔는데 리비트가 맡은 일은 사진에 있는 별의 크기를 측정해서 별의 등급을 기록하는 일을 도왔었습니다. 현미경으로 사진 건판에 있는 별의 크기를 측정해서 그 크기를 토대로 별의 등급을 밝히는 일이었죠. 또한 변광성을 찾는것 역시 찾았는데 이것역시 사진 건판에 있는 별의 사진들중 다른 사진들과 비교해서 별의 크기가 차이나는 것을 찾는것이었습니다. 특히 리비트는 별의 등급을 측정하는데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리비트가 무급으로 일한것은 아마도 그녀가 다른 고등교육을 받은 상류사회 여성들처럼 "직업"을 가질 필요성이 없었을가능성이 큽니다.
리비트는 1896년까지 같은 일을 했었지만, 2년간 유럽으로 여행을 다녔으며 이때문에 일을 잠시 중단했습니다. 그녀는 유럽으로 떠나기전 피커링에게 유럽에서 돌아온뒤 자신이 하던 일을 끝내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만 유럽에서 돌아온 뒤 다시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의 교회가 있는 위스콘신으로 가서 그곳 대학에서 일을 합니다.
1902년 리비트는 피커링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작업 노트를 보내준다면 일을 마무리하겠다고 합니다. 또 그녀는 자신의 건강상태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귀가 거의 들리지 않으며, 추운 날씨를 견딜수 없기 때문에 따뜻한 곳에 있는 천문대에 일할수 있을지도 물어봅니다. 피커링은 리비트를 정식직원으로 고용하기로 했죠. 하지만 리비트는 바로 하버드 대학교 천문대로 가지 않는데, 가족들이 그녀의 일에 대해서 그다지 반기지 않았고 또 다른곳으로 여행을 갔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8월이 되어서야 하버드 대학 천문대로 돌아갔지만, 하루에 4시간정도밖에 일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1903년 리비트는 위스콘신에서 하버드대학교가 있던 캠브리지로 완전히 이사왔으며, 친척아저씨와 함께 천문대 근처의 저택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주 가족들을 방문하러 갔으며 겨울에는 건강때문에 따뜻한곳으로 여행을 갔었습니다.
1904년 리비트는 소마젤란성운에서 많은 변광성을 발견합니다. 이후 그녀는 마젤란성운에서의 변광성에 대한 관측과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1908년까지 리비트는 2000여개의 변광성을 마젤란 성운들에서 발견했고 이를 발표합니다. 이때 리비트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게 되는데 마젤란 성운들에 있는 변광성들은 변광하는 주기가 길수록 밝기다 더 밝다는 사실이었죠.
그리고 1912년에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특정한 변광성은 주기가 증가할수록 광도도 증가한다는것을 밝혀냅니다. 리비트가 연구한 별들은 "세페이드 변광성"이라고 불리는 변광성이었죠.
세페이드 변광성의 주기-광도 관계는 단순히 별의 특징을 넘어서서 우주의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주기-광도 관계로부터 별의 절대등급을 얻을수 있으며 별의 상대등급과 절대등급을 안다면 별까지의 거리를 알수 있게 되는것이었죠.
리비트의 연구는 곧 많은 학자들에 의해 이용됩니다. 특히 헤르츠스프룽,샤플리,허블등이 자신의 중요한 연구에 이 세페이드 변광성을 "거리를 재는 척도"로 이용하게 되죠.
이것은 우주의 크기에 대해서 명확하게 잴수 있게 해준 첫번째 계기였기에 매우 중요한 연구였죠.
리비트는 늘 건강이 나빴으며 자주 천문대를 비웠습니다. 하지만 변광성 부분에 대한 능력은 매우 뛰어났기에 피커링은 요양중인 리비트에게 자료를 가지고 가서 연구하도록 허락했을정도였다고 합니다. 피커링이 사망한뒤, 1921년샤플리가 하버드 천문대 대장으로 오면서 피커링이 맡았던 일들을 모두 그가 고용했었던 여성들에게 넘기게 됩니다. 캐넌이 피커링의 뒤를 이어 총 책임자가 되었으며 리비트는 별의 분광학 부분의 책임자로 했었던 변광성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었죠. 하지만 늘 건강이 좋지 않았던 리비트는 1921년 12월 사망했었습니다.
리비트의 업적은 살아 생전보다 죽은후 더 인정을 받았는데, 특히 그녀의 죽음을 알지 못햇던 스웨덴 수학자는 리비트를 노벨상 물리학 수상후보로 추천하려했을정도였다고 합니다. (노벨상은 죽은 사람에게는 수여하지 않는 상이라서 결국 리비트는 후보가 될수 없었습니다.)
자료출처
1. http://www.3towers.com/sgrasslands/essays/Leavitt/Leavitt01.asp
2.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