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여성 천문학자
안토니아 카에타나 데 파비아 페레이라 모리 (Antonia Caetana de Paiva Pereira Maury)는 1866년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모리 가문은 미국의 상류층 가문중 하나였습니다. 미국 초기 역사에서 등장하는 가문이었습니다. 안토니아 모리의 고조부였던 제임스 모리 목사는 세명의 미국 대통령을 가르쳤던 인물이었죠. 안토니아의 아버지인 미튼 모리는 목사였지만, 사촌인 메튜 모리 중령은 미국 해군 연구소 소장으로,천문학자이자 해양학자였습니다.
안토니아 모리의 어머니인 버지니아 드레이퍼는 의사이자 자연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닥터 존 윌리엄 드레이퍼의 딸이었죠. 안토니아의 외삼촌이 바로 헨리 드레이퍼였습니다. 또 외할머니인 안토니아 카에타나 데 파비아 페레이라는 포르투갈 출신의 귀족으로 포르투갈 궁정 의사의 딸이기도 했었습니다. 이처럼 가문 사람들이 자연과학에 매우 관심이 많은 인물들이었기에 안토니아 모리와 그녀의 형제자매들 역시 자연과학에 대해서 어린시절부터 많이 접하게 되었었죠. 이때문에 안토니아 모리는 천체물리학자, 자매인 카를로타 조아퀴나 모리는 고생물학자, 형제인 존 윌리엄 드레이퍼는 의사가 됩니다.
1887년 모리는 배서(Vassar)대학을 졸업했는데 이때 물리학,천문학,철학등을 공부했었습니다. 이때 안토니아는 배서대학교수였던 마리아 미첼에게서 천문학을 배웠다고 합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모리는 하버드 대학교 천문대의 에드워드 피커링의 팀에 합류하게 됩니다. 아마도 그녀는 이 작업에 대해서 잘 알았을것인데,피커링에게 기금을 지원했던 헨리 드레이퍼의 미망인은 모리의 외숙모이기도 했었기 때문이죠. 모리는 이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됩니다.
피커링의 팀에서 분류작업을 하는 동안 모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분류체계를 주장하게 됩니다. 단순히 수소선 스펙트럼선에 따른 분류외에도 스펙트럼선들이 얼마만큼 강하게 나타나는것인가와 그 스펙트럼 선들 사이의 간격에 따른 분류도 함께 했던것이죠. 이런 이차원에 대한 분류는 획기적인것으로 사실상 피커링이 고용했었던 다른 여성들이 별의 분류에서 오직 피커링의 아이디어에 따라 별을 분류했던것과는 달리 독창적으로 자신만의 연구를 발전시킨 경우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리의 연구에 대해서 피커링은 회의적이었으며, 모리의 연구가 자신의 연구 목적과는 맞지 않는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또 모리는 중요한 연구를 하나했었습니다. 이전 피커링 팀은 미자르가 스펙트럼선 상으로 다시 쌍성이라는것을 알아냈었습니다.(미자르는 눈이 좋은 사람은 그냥 봐도 두개로 보이는 쌍성이었습니다만, 스펙트럼상으로 보면 이 두개의 쌍성에 다시 각각 동반성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1889년 모리는 독자적으로 마차부자리의 베타성 역시 하나의 별처럼 보이지만 스펙트럼 분석상 쌍성이라는 점을 밝혀냅니다. 그리고 이 두 쌍성들에 대한 주기와 궤도를 계산했었죠. 하지만 피커링은 1890년 발표에서 잠시 모리를 언급했을뿐 이후 연구에서는 그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여러가지 문제는 결국 모리가 피커링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모리는 결국 피커링의 팀을 떠나 교편을 잡게 됩니다. 주로 피커링의 횡포가 심했지만 모리가 다른 여성들과 달리 피커링에 대해 불만을 품을수 있었던것은 어쩌면 그녀가 피커링의 프로젝트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모리는 헨리 드레이퍼의 조카였으며 결국 프로젝트 기금을 지원한 앤 드레이퍼의 조카가 되기도 했죠. 이런 관계는 모리가 피커링에 처사에 대해 반박할수 있는 힘을 실어줬을듯합니다. 또 피커링 역시 이런 모리가 껄끄러운 상대였을듯합니다.
하지만 모리는 다시 피커링의 팀에 잠시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게 됩니다. 피커링이 모리를 다시 받을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기금의 설립자와 모리가 친척관계였기 때문이었을듯합니다. 모리는 단순 작업을 해야하는 자신의 일에 그다지 탐탁지 않아했고 자신만의 연구를 하길 원했었습니다.
1893년과 1895년 모리는 잠시 피커링의 팀에 들어왔었는데 이때 그녀는 별들의 분류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완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1897년 자신의 연구 결과를 저널에 발표했었죠.
모리의 연구 결과는 피커링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다른 연구자에게 큰 영감을 주게 됩니다. 덴마크 화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헤르츠스프룽이 모리의 연구를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별들의 밝기와 등급에 대한 연구에서 별들을 크게 두개의 부류로 나누었는데 특히 "red giant"는 모리가 분류한 별들중 c class의 별들임을 주목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아이디어를 토대로 절대등급과 온도에 대한 2차원적인 별의 분류를 시도하게 되죠. 그리고 이 연구 결과는 헤르츠스프룽-러셀 다이어그램으로 알려지게 됩니다.(헤르츠스프룽과 미국 천문학자였던 헨리 러셀의 공동 연구였기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것입니다. 이름이 너무 길어서 보통은 HRD라고 표기합니다.)
피커링의 팀에서 나간후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코넬등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1918년에는 하버드 대학에 조교수로 가게 되죠. 피커링은 1919년 사망했으며, 모리는 피커링의 후임으로 온 핼로우 샤플리와는 학문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죠.
모리는 교편을 잡고 있었을때도 꾸준히 자신의 연구를 진행했었습니다. 특히 그녀는 쌍성에 대한 스펙트럼 연구를 집중했는데 특히 거문고자리의 베타성에 대한 연구를 집중했었습니다. 그리고 1933년에는 이 연구에 대해서 발표를 했었죠.
1935년 하버드에서 은퇴한 모리는 자연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녀는 숲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었죠. 또 비록 학교에서는 은퇴했지만 여러 협회의 회원자격을 계속 지속했고 자신의 개인 연구 역시 지속했었습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 세운 천문대였던 드레이퍼 기념 박물관의 책임자로 일하기도 했었습니다.
모리는 1943년 "애니 점프 캐넌 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그녀의 수상 이유는 별의 스펙트럼 분석에 대한 공헌때문이었습니다. (재미난 것은 캐넌 역시 피커링의 팀의 일원으로 별의 분류에 대한 방법을 제시했던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에 있는 작은 크레이터들인 "모리"크레이터 역시 안토니아 모리와 그녀의 사촌이었던 매튜 모리를 기념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안토니아 모리는 1952년 뉴욕에서 사망했습니다.
자료출처
1. http://vcencyclopedia.vassar.edu/alumni/antonia-maury.html
2.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