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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앤 Sep 20. 2020

#9. 네그로니 (Negroni)

낭만 소생법

관광 말고 여행

나는 관광이 아닌 여행(旅行)을 좋아한다. 관광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나라의 풍물이나 관습을 구경하는 일'이라고 되어있는 반면, 여행 - 여기서 ‘여’는 나그네 ‘여’를 쓰는데 -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나그네의 걸음'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영어 역시 마찬가지다. 관광은 통상 투어리즘(Tourism), 상업적 목적의 다님과 산업으로 이해되는 반면, 여행을 뜻하는 트래블(Travel)은 자발적으로 시간을 들여 거주지가 아닌 곳을 여유를 가지고 방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행, 그리고 정확히는 '혼자 하는 여행'을 좋아한다. 지금도 일 년에 한 번쯤은 혼자서 훌쩍 어디론가 떠나야 직성이 풀린다. 대학 다닐 때 짬짬이 시간을 내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이유도 여행경비를 벌겠다는 목적이 상당수였고, 모아 둔 돈의 대부분을 여행에 투자했다. 내가 좋아하는 책, 음악 또는 영화의 배경지이거나 발상지면 그곳만 - 나라건 도시이건 - 샅샅이 뒤지듯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내 발자국이 모든 곳에 남길 정도의 다님을 추구하는 그런 여행 말이다.


수능 못지않은 대입 시험을 끝내고 갔던 첫 솔로 여행지는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Edinburgh). 내가 왜 하필이면 이 곳을 여행지로 선택했는지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는데, 당시 살았던 맨체스터에서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기에 택했던 것 같다. 호스트 패밀리의 걱정에도 무릅쓰고.


에든버러에서의 10일. 나는 맥킨토시의 발상지인 글라스고(Glasgow)니 네스호의 괴물로 유명한 Loch Ness - Loch는 스코틀랜드 게일릭(Gaeilic)어로 호수(Lake)를 의미 - 등 유명한 곳은 모두 제쳐놓고, 그냥 에든버러에서 지냈다. 에든버러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코끼리 카페(The Elephant House)라는 곳에서 당시 풍족하지 않았던 조앤 K 롤링(J. K. Rowling)이 음료 한잔을 시켜 놓고 상상력을 벗 삼아 세기의 역작이라고 불러도 부족한 해리포터 시리즈를 집필했다는 정도였다.  

에든버러, 코끼리 카페 (출처: Facebook)

에든버러가 위험하다는 호스트 아주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싸준 샌드위치와 바나나, 티셔츠, 세면도구만 배낭에 찔러 넣고 훌쩍 떠났다. 에든버러로.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은 채, 단순히 코끼리 카페에 가보자는 계획 하나만 가지고 말이다. 한 번에 바로 가는 기차가 없어서, 뉴캐슬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5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에든버러 맨체보다 축축한 날씨 그리고 음산한 기운이 맴도는 도시였다. 산 위의 성곽들 그리고 맨체스터 억양보다 더욱 알아듣기 어려운 영어, 하지만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한 사람들, 내가 느낀 이 도시의 첫인상이었다.


내가 에든버러에서 처음 한 일은, 워터스톤즈(Waterstone's)에 가서 팝업(Pop up) 지도를 산 것이다. 지도를 펼쳐 거리명이 예쁜 곳들은 죄다 형광펜으로 표시했다. 무작위로 표시한 곳들이 내가 가보고 싶은 곳들이었다. 그렇게 무작정 호스텔을 나와 하루하루 내가 지도에 색칠한 곳들을 하나둘씩 가보았다. 시내, 주택가 등등. 내가 이 도시에서 가장 마음에 든 곳은 도시 외곽, 동서남북에 골고루 퍼진 작은 언덕 같은 산들이었는데, 그 가운데 애비언덕(Abbey Hill)이 가장 좋았다. 발목까지 올라온 검은색 컨버스 캔버스화를 신고 나름 거친 산기슭은 올라가면서, 정상이라고 부르기에도 하찮은, 하지만 귀여운 그곳에 다다르면 소기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유 없는 산행을 감행한 후, 손으로 돌려 딸 수 있는 가장 저렴한 Blossom Hill 레드와인 병을 입에 물고 하루 종일 도시 전체에 따뜻한 온도와 밝은 빛을 선사했던 태양이 제 몫을 다하고 장렬히 전사하며 마멀레이드 빛으로 파란색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을 보며 그렇게 10일을 보냈다. 입시 결과에 대한 우려는 잠시 뒤로한 채 말이다. 에든버러에서의 10일은 서툴지만 아름다운 내 인생 첫 여행지로 기록되며, 나는 그 이후 혼자 하는 여행에 사로잡혀 훌쩍 이곳저곳으로 떠나곤 했다.


고전적인 적갈색, 피렌체의 기억  

2009년 6월 초, 졸업 논문을 거의 다 써갈 때 즈음, 별생각 없이 이지젯(Easy Jet, 저가항공사) 웹사이트를 기웃거리다가, 충동적으로 25 파운드 남짓되는 로마 입국-피사 출국행 비행기표를 구매했다. 사실 로마와 피사는 들러리에 불과한 도시였고, 6월 중순 논문도 마무리하지 않은채 충동적으로 1주일의 시간을 보낸 곳은 바로 피렌체(Firenze).  


피렌체는 내가 꼭 가보고 싶은 도시였다. 이유는 첫째, 도시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둘째, ‘냉정과 열정사이’의 배경지라서.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는 2001년 개봉한 일본 영화인데, 유명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 원작이다. 내가 정말 유일하게 좋아하는 멜로 영화라고 해야 할까. 10번도 넘게 본, 한글자막이 없어도 완벽히 일본어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보았다.


터질듯한 감정을 부여잡고 호흡을 가다듬는 이 영화 초반에 준세이가 끼안띠(Chinati) 와인 기운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자전거를 힘겹게 끌고 가는 장면이 있다. 이 신을 배경으로 흘러가는 준세이의 독백 ‘그래. 나는 잊지 못하는 여성이 있다. 아오이라는 이름의 한 여성을.’ 그렇게 10년 동안 잊는 것을 거부첫사랑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준세이 아가타. 준세이는 왜 하필이면 피렌체에 온 것일까. 표면상으로는 미술 복원사가 되기 위해 피렌체로 유학을 왔지만 10년 전, 아오이와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다.

냉정과 열정사이 한 장면 (출처: 한국경제)

내가 피렌체를 여행했을 당시, 나는 고독한 눈동자를 가진 아오이도 아니고, 나를 기다리는 준세이도 없었지만, 약속이나 한 듯 피렌체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도 들르지 않고 바로 두오모 성당으로 가서 400개 이상 되는 회오리 계단을 올라 성당 꼭대기로 향했다. 문제는 너무나 급하게 올라간 그곳이 두오모가 아닌 다른 기둥이었던 것. 계단을 올라갈 때 밖으로 보이는 작은 창문 사이로 갈색 지붕이 보이길래, 그게 성당 지붕이겠거니 하며 여유롭게 마음을 놓고 한걸음 한걸음을 올라갔다. 그런데 그렇게 힘겹게 올라간 계단 끝, 그 도착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착오’였다. 재빨리 계단을 내려가 성당 경비원 아저씨에게 두오모는 어딨는지 다급히 물었고, 아저씨는 손을 뻗어 정확히 반대편을 알려주었다. 나는 재빨리 반대편으로 뛰어가 8유로라는 거금을 다시 내고 두오모 출입 허용시간이 끝나기 전에 미친 듯이 계단을 올랐다.

계단 틈 사이로 보이는 창문에서 찍은 사진 (2009년 6월)

그렇게 1,000개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도착한 두오모 성당의 종탑, 나는 준세이와 아오이가 재회했던 그 장소를 탐색하기 위해 한 바퀴를 삥 돌았다. 그렇게 돌고 돌아 그들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듯한 흰색 벽돌에 새겨진 문구, ‘사랑한다(TI AMO)’를 보고 나름의 낭만의 시간속에 빠져들어 갈색지붕을 내려다보고, 피렌체 시내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에 압도되었었다.   

2009년 6월 피렌체 두오모 성당 꼭대기 벽돌에 새겨진 'Ti amo'

1주일 동안의 짧은 여행기간 동안 두오모 성당 다음으로 내가 좋아했던 곳은 아르노(Arno) 강 근처였다. 다리 위에 지어진 집들을 바라보며, 냉정과 열정사이 OST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인 Whole nine yard 연주곡을 무한반복으로 듣고 다리에 앉아 슈퍼마켓에서 산 과일, 치즈 그리고 와인을 식사로 대신하며 적색 노을을 보며 하루를 마치곤 했다.

다리에서 바라본 아르노 강 (2009년 6월)

나는 이렇게,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의 수도, 피렌체에서 1주일을 보냈다. 준세이와 아오이를 생각하며, 그리고 적색 빛이 감도는 갈색의 도시 피렌체의 곳곳을 누비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곤 했다. 지금 조금 후회하는 일이 있다면 사람이 많고 줄을 길게 서야 한다는 이유로 우피지(Uffizi) 미술관을 가지 않은 것인데, 뭐 그것만 뺀다면 피렌체에서 보낸 1주일은 나름 낭만적이었다.


풍족하지 못한 유학생 시절, 나는 그렇게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나름의 낭만으로 가득한 여행을 하며 잠시나마 미래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지금도 성격상 딱히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미리 걱정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다만, 20대 초반 누구보다 자신할 수 있었던 고귀했던 낭만은 썩어 문 들어 질만큼 녹슬었고, 30대 중반의 나는 낭만이라는 말이 너무나 어색해진 굉장히 현실적이고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시간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퇴폐적인 인간이 되어버렸다. 내가 지금 피렌체를 가면 잃어버린 낭만을 되살릴 수 있을까?


피렌체의 기억, 그리고 네그로니(Negroni)

피렌체와는 이역만리 떨어진 이 곳 자카르타는 고전적이지 않다. 문화재 복원 자체가 안된 도시기에 바타비아(Batavia, 네덜란드령 시대 자카르타의 옛날 이름) 지역에 가면 이미 불에 탄 흔적들이 사방 군데다. 복잡하고 지저분한 거대 도시는 현실을 부정한 듯한 에너지 비효율적인 고층건물만 즐비하. 아이러니 한 점은 고층에 올라갈수록 빌딩 사이사이에 낀 빈민가 모습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애써 판자촌을 외면하고 정면을 바라보면 현실을 가리는 모순적이지만 아름다운 하늘의 진풍경을 볼 수 있다.


자카르타는 적도에서 가깝고 산지가 아닌 평지로 이루어진 도시기에 시야가 탁 트인다.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무한한 지평선이 마치 하루를 고생한 태양의 쓰러짐을 나지막이 수용하듯 열대지방만의 화려 노을을 선사한다. 자카르타는 솔직히 매력적인 도시는 아니지만 노을만큼은 인정한다. 퇴근길 고개를 들어 하늘은 보 형형색색의 물감들이 다시는 볼 수 없을 듯한 풍경화를 연출하는데, 이 곳의 노을을 보고 있자면 짜증으로 가득 찼던 하루가 어느 정도 위로를 받는 느낌이다. 졸업 후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도 성가신 논문의 결론도출도 뒤로 한채 다리 위로 펼쳐진 노을을 바라보던 피렌체의 1주일, 그 낭만 가득했던 시간이 불현듯 떠오르듯 말이다.


내가 이 곳 자카르타에서 피렌체를 기억을 잠시나마 소생하는 방법은 바로 네그로니(Negroni)이다.


진(Gin), 캄파리(Campari), 스위트 베르무스(Sweet Vermouth)가 각각 20-25ml씩 동량으로 들어가는 깊은 적색 빛의 칵테일, 네그로니는 밀라노에서 미국인 여행자들을 상대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아메리카노(Americano) - 캄파리, 스위트 베르무스를 각각 45ml씩 넣은 후 클럽 소다를 부어 마무리하는 칵테일 - 의 맛과 향을 조금 더 강하게 만든 칵테일이다.


식전주(aperitivo) 스타일의 칵테일인 네그로니는 1919년 피렌체 카페 카소니 Caffe Casoni에서 만들어졌다. 카밀로 네그로니 백작(Count Camillo Negroni)이 그의 벗이자 이 바의 바텐더인 포르스코 스칼셀리(Forsco Scarselli)에게 그가 가장 즐겨마시던 아메리카노를 조금 더 강하게 만들어달라고 주문해 탄생한 칵테일이 바로 네그로니이다. 스칼셀리는 네그로니 백작이 좋아했던 진(Gin)을 클럽 소다 대신 넣어서 만들었고, 아 칵테일의 이름을 '네그로니'라고 지었다.  

네그로니 백작 (출처: The Art of Campari 웹사이트)

카밀로 네그로니 백작은 1920년 초반 이미 미국을 여러 번 여행했던 이탈리아인으로서 카우보이의 삶을 지향했을 만큼 미국 문화를 상당히 좋아했던 귀족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유럽 귀족들이 즐기던 와인보다는 당시 금주령 시대에 미국 전역에서 암암리에 인기를 끌던 칵테일을 더 즐겨마셨다고 한다. 네그로니는 시럽이나 주스가 첨가되지 않고 3가지 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향과 맛이 세고, 위스키 베이스의 유사 칵테일, 올드 패션(Old Fashioned)이랑 비슷해 남성들이 애호하는 칵테일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식전주가 그렇듯 입맛을 돋우게 한다는 명분으로 좀 쓴 술들이 많다. 네그로니는 술맛이 확 풍기는 쓴 맛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오렌지향의 산뜻한 끝 맛 그리고 스위트 베르무스가 혀 전체에 퍼진 쓴맛을 보살피는 듯한 달콤함으로 마무리되는 그런 칵테일이다.


매일 저녁 6시만 되면 ‘알라~ 아크바르(Allahu Akbar)’라는 첫 소절과 함께 모스크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기도소리가 무슬림 신자도 아닌 내 마음을 경건하게 만드는데, 나는 가끔 코란 대신 네그로니를 손에 들고 자카르타의 지평선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곤 한다. 오후에는 단조로웠던 하늘색이 보라색으로 그리고 그 아래 드넓게 퍼지는 네그로니의 색처럼 주황빛으로 물든 자카르타의 노을은 꽤 멋지다. 오후 5시까지 이어졌던 나의 애석한 짜증이 무색할 만큼 아름답고 평소에는 소음으로 취급하던 기도소리도 거슬리지 않는다.


네그로니 레시피

네그로니 (Negroni)


[네그로니 재료]

몽키 47 진 60ml

마티니 로소 (스위트 베르무스) 20ml

캄파리 20ml

오렌지 껍질 1장

*원래 레시피는 동량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진을 3배 정도 넣은 네그로니를 좋아한다. 물론 1:1:1로 비율로 하면 조금 더 순한 칵테일을 맛볼 수 있다.


섞는 방법, 아니면 믹싱 글라스에 넣고 얼음을 넣어 희석시키는 방법, 이렇게 두 가지가 있는데, 나는 섞는 방법을 선호한다. 섞으면 조금 더 질감이 부드럽다. 3가지 재료를 넣고 얼음을 3-4개 넣고 10번 정도 흔든 후 얼음 위에 붓는다. 오렌지 껍질로 장식한다.


저녁 6시면 깜깜 해지는 이 곳 자카르타, 이 곳에서 과연 사라진 낭만을 깨울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회의적이긴 하지만 네그로니를 창가에 두고 한번 생각해본다. 피렌체에서 내가 낭만을 깨울 수 있던 것은 피렌체라는 도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학생이었던 내 신분 때문이었는지.


피렌체, 적색의 고전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도시여, 웅장했던 과거의 아름다움을 도시 전체에 품고 있는 너는 오늘도 잘 지내겠지. 준세이와 아오이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고, 그들이 갈구하던 몸짓과 감정이 도시 전체에 깃들 린 피렌체. 나는 그곳에서 보낸 1주일이 낭만, 그 자체였는데, 이 곳 자카르타에서도 피렌체가 깨웠던 낭만을 되살릴 수 있길 기대하며, 네그로니를 한 모금 마셔본다.  


참고문헌

1. Gin Foundary https://www.ginfoundry.com/cocktail/negroni-cock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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