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을 닮은 어여쁜 친구의 기억
서유럽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애주 국가인 아일랜드 공화국(통상 남 아일랜드라고 불리는 곳)엔 문학작품 같은 건배사들이 수두룩 하다. 그 가운데 배(Ships)를 운율로 하여 지금까지 전해 내려 오는 우정에 관한 유명한 건배사가 있다.
“There are good ships. And wood ships, that sail the sea.
But the best ships are friendships and may they always be.”
Ships의 운율을 살려 완벽히 번역하기에는 어렵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자면, "좋은 배가 있고, 바다를 항해하는 나무배가 있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배는 벗과 함께 하는 배(우정)이며, 그것은 영원할 것이다" 정도일 것 같다.
알코올음료인 술은 어느 정도의 각성효과가 있다. 사람마다 술에 대한 반응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지만, 적당한 음주는 기분을 좋게 하고, 때로는 잠시나마 이성을 잠재우는 기능을 발휘하기까지 한다. 흔히 말하는 '맨 정신'에는 용기가 나지 않아 술에 기대거나 탓하는 경우도 종종 있을 만큼, 술이란 일상생활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하는 녀석인 것 같다. 사랑을 고백할 때, 마음에 맞는 친구를 사귈 때, 때로는 친구와 다투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했을 때, 술은 기쁘든 슬프든 모든 사건을 목도하는 애꿎은 무생물이다. 그리고 흔히들 말하는 술자리, 그 왁자지껄한 장소에는 술이 내 몸과 정신을 지배하는 것을 용인하는 희한한 곳이며, 마치 내일이 없을 아폴칼립스(Apocalypse)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며 내 옆에 '친구'라는 자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그런 곳이란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나는 흔히들 말하는 술자리를 즐기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속된 말로 꽐라가 되도록 회식을 해본 적이 없다. 솔직히 말해 완전히 '남'인 회사 사람들과 내가 혼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술을 마시며, 의미없는 떠듦을 하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다. 게다가 내가 자주 마시는 주종은 칵테일이기에 소주와 맥주로 어질러져있는 회식자리 또는 술자리랑은 그렇게 어울리지도 않는다.
이런 나도 가끔은 칵테일 한 잔을 장식 삼아 이성을 놓지 않은 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벗들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내 인생에 아일랜드의 건배사를 나눌 멋진 대상이 있을까.
내 인생에 벗이라. 친구(親舊), ‘친하고 오래된 상대’를 의미하는 이 다정한 어감의 단어는 이상하게도 내게는 썩 어울리지 않는 말인 것 같다. 마치 밋밋한 얼굴이 지겨워서 얼떨결에 등 떠밀려 타의로 한 화장처럼 말이다.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는, 사교(社交)라는 것은 내게 있어 매우 결여된 개념이며, 나는 혼자 지내는 시간을 친구따위에 낭비할 수 없다는 이기심이 큰 사람이다. 누구를 만나는 것 자체가 에너지 소모가 상당하다고 해야 할까.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 자체를 체질적으로 어색해하는 성격 탓에 그 흔한 동창회 구성원도 아니고, 그 어떤 정기적 모임도 없다. 물론 그렇다고 내 옆에 친구라는 존재가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회사생활에서도 표면적으로는 사교성을 유지하며 지내고 있다. 특히 내가 가진 직업의 특성상 ‘바깥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성벽같이 철저하게 쌓아온 혼자만의 시간도 ‘사교’를 요구하는 시간과 업무들이 쌓이면 얄팍한 태도와 옅은 미소를 얼굴에 씌우고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관계와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이 정도의 뻔뻔함과 가식은 내가 그렇게 혐오했건만 생존을 위해 쓸쓸히 타협했다. 비겁한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피상적인 행동 역시 돈을 벌기 위한 일종의 수단에 불과한 행위이기에 가능한 것이지 나는 기본적으로 ‘일’로 만난 관계를 그 이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원하지도 않고, 오히려 역효과만 나는 것 같다.
물론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호흡이 잘 맞는 동료, 선배 또는 사수를 만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들과 사무실이 아닌 외부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일 이외의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려고 해도 경험상 잘 되지 않고, ‘일’이라는 화젯거리 또는 내부 조직 내 공공의 적(주로 상사나 남한테 피해만 끼치는 사람들에 대한 험담)에 대한 주제가 떨어지면 급격히 어색해지는, 그야말로 별 것 아닌 ‘남’이 되어 버린다.
그만큼 회사생활을 통해 벗을 찾기란 마치 하늘에 새로운 별을 새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며 상당히 귀찮은 일인 것 같다.
10대부터 지금 30 중반까지 나는 꾸준히 이방인의 생활을 해왔기에 항상 기존 무리들의 텃새를 감내하며, 이 것을 이겨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했다. 가능한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기에는 사교성이 강요되었던 시절이라, 사회적으로 어색한(socially awkward) 청소년은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며, 선생님이라는 사람들이 정상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회성을 우회적으로 강요하기도 했다. 선생님의 끊임없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혼자가 편한 사람으로 지냈고, 이 성향은 대학생 때도 계속 유지되었다.
무조건 팀 과제가 있는 수업은 피했다. 반드시 수강해야만 하는 과목 이외의 여타 전공과목들은 무조건 10명 이하가 정원인 세미나 수업이거나 에세이 수업이었다. 개인플레이로도 충분히 학점 확보가 가능한 그런 수업들 말이다. 이런 종류의 수업에서 요구되는 상호작용은 기껏해야 지도 교수와의 대화 정도. 언어 이론, 담론 분석학, 사회와 언어, 듣기만 해도 고리타분하고 인기 없는 이런 수업들은 모두 내 독차지였다.
그렇게 혼자 지내는 게 더욱 편하고 익숙해진 세월을 보내다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나의 의견을 존중하고, 때로는 나의 편협한 사고에 다양성을 채워 넣은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친구가 된 사람들이 있다. 특히 친구라는 대상들의 생일날, 상대가 좋아할 만한 것을 몇 일정도 고민하고 연구해서 준비한 선물, 그리고 그 대상을 위해 최소 1시간은 내 머릿속에 그 온전히 그 사람을 생각으로 가득 채워 써 내려간 편지. 이런 행위들은 나만을 위해 주어진 모든 시간을 할애하고 과식했던 것과는 다른 기분 좋은 행복감 그리고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도 애써 부정하긴 하지만 일부분은 이타적인 면이 어느 정도는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의 수줍음, 하지만 찰나의 어색함을 견딘 후 다가온 환희는 굉장히 새로운 희열이라고 해야 할까.
의도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며, 그 누군가를 만나서 서로 비슷한 가치를 공유하며 공감대를 형성한다든가 때로는 서로 다른 성향이 호기심으로 발전하여 편견과 선입견에서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어가는 것이 내게 있어 '친구'라고 불리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연령대를 고려하지 않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만나면 스치는 인연 또는 아는 사람에서 조금 더 특별함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2012년 2월, 동상에 걸린 발을 동여 메고 브뤼셀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팀 과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내가 그렇게 발버둥을 쳤겄만 어쩔 수 없이 졸업을 위해서는 해야만 했던 내 인생 첫 팀 과제. 독불장군 판박이였던 레오 반 아덴호븐(Leo Van Adenhove) 교수는 크리스마스 방학 전 대놓고 비민주적으로 그룹을 편성하겠다고 고시했고, 그렇게 나는 안면도 없는 팀원 3명을 학교 캔틴에서 만났다.
소피, 벤, 그리고 나탈리(Natalie). 이 3명 중 나탈리는 독일 에센(Essen) 출신의 패션 블로거였고, 아름답다는 뜻의 독일어 schón과 본인의 이름 나탈리를 합친 Schnati라는 예명으로 친언니와 함께 나름 유명한 패션 블로그를 운영하는 친구였다. 첫인상 자체가 보그 잡지에 나올 것 같은 신비스러운 소녀 이미지. 내 주먹보다 작은 얼굴에 뾰죡한 턱선, 그리고 바닷가에서 우연히 찾은 에메랄드빛의 조약돌 같은 눈동자, 곱실거리는 진저 헤어. 소녀 테를 아직 못 벗은 주근깨 많은 콧 등, 깡마른 몸. 처음에는 말 붙이기 힘들 것 같은 느낌의 그런 친구였는데, 나탈리는 팀원들 가운데 나를 가장 반겼다.
보름 기간 동안 우리 넷은 거의 매일 만나 팀 과제 및 시험 준비를 했고, 나름 납득할만한 성적을 거두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 나는 팀 과제 끝나면 당연히 관계가 소원해질 줄 알았는데, 나탈리는 시험이 끝나서도 내게 “뭐하냐며” 자주 메시지를 보냈다. 학교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내가 외톨이인 줄 알았는지, 그녀는 거의 매일 커피를 마시자거나 같이 아침을 먹으러 가자고 하는 등 연락해댔다. 처음에는 선약이 있다며 둘러댔는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결국 마지못해 어색함을 등에 업고 학교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목적을 추구하는 관계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난 우리 둘. 우리의 첫 사적인 대화는 거의 5시간 넘게 이어졌고, 우리는 그렇게 절친한 사이가 되어갔다. 내가 벨기에를 떠난 2012년 9월 전까지 거의 매일같이 나탈리를 보았다. 거의 하루도 나 혼자 있는 날이 없을 정도로. 하지만 싫지 않았고, 피곤하지도 않았다.
나탈리는 나와 달리 매우 사교적인 친구였는데, 이미 먼데이 클럽(Monday Club)이라는 5명 남짓의 모임을 결성할 정도 활동적이었다. 매주 월요일 오전 10-11시 30분 수업이 끝나면 나탈리를 포함한 5명의 무리들은 학교 뒤 Kultuurkaffee라는 곳으로 향했다. 이 먼데이 클럽 멤버들은 50유로 센트 맥주 파인트를 양손에 들고 다양한 이야기를 해 질 녘까지 나누던 귀여운 사교 조직이었다.
내가 먼데이 클럽에 처음 합류한 날은 3월 말이었던 것 같다.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던 브뤼셀의 늦겨울, 눈이 멀 것 같아도 해괴한 영국 날씨보다 더욱 가관인 벨기에의 우울한 날들을 보상하는 강렬한 햇살이 아쉬워 집으로 가기 머뭇거렸던 그 날, 나탈리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내 손목을 이끌고 “오늘 먼데이 클럽 멤버 되는 거야.”라며 잔디밭으로 끌고 갔다. 나는 맥주 대신 진토닉을 시켰고, 평소에는 발도 딛지 않는 잔디밭에 앉아 센 바람에 출렁거리는 진토닉을 마셨다. 그렇게 한 10분 정도 흐른 후 요나스, 안토니오, 스텐 그리고 카트린 등 먼데이 클럽 정회원들이 왔고, 그렇게 나는 먼데이 클럽의 일원이 되었다.
나탈리와 나는 브뤼셀에서 같이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다. 나탈리는 세인트 질(St. Gille)이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그곳에는 Potemkin이라는 바가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새벽 5까지 와인 한 잔씩 시켜놓고 프란츠 카프카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나탈리 남자 친구 - 지금은 남편이 된 - 이야기를 했다. 그 외에도 워낙에 환경 보호에 앞장서는 친구여서 환경이야기도 많이 했다.
둘 다 흡연자가 아니었던 터라 포템킨에서 술을 마시다가 담배연기가 뿌옇게 실내를 감싸면, 근처 나탈리 집으로 가서 따뜻한 모로칸 민트 티를 마시곤 했다. 모로칸 민트 티는 나탈리가 가장 좋아하는 허브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나 혼자만 가던 브뤼셀 플라제(Flagey) 동네의 르 쁘띠 까농(Le Petit Canon)에 나탈리와 함께 갔다. 이 곳은 웅장한 포템킨과는 달리 앙증맞은 작은 와인바였다. 버건디 자주색으로 실내를 꾸며놓은 곳이어서 들어가면 무조건 와인 한잔은 마셔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의 그런 곳. 나는 매주 한 번은 1유로 레드 와인을 한 잔 마신 후 30분 남짓의 사색 때로는 독서를 마친 후 집으로 가는 게 낙이었는데, 그 귀여운 곳에, 나탈리와 함께 가니 혼자 가던 것과는 다른 색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와인을 즐겨마시지 않는 나탈리는 와인 대신 패스티스(Pastis)라는 칵테일을 시켰고, 그 칵테일은 아니스(anise) 그리고 리코리시(liqorice)를 주재료로 한 식전주였는데, 프랑스의 양조장 리샤르(Richard)에서 만든 패스티스에 탄산수를 부은 불투명한 색의 칵테일이었다. 르 쁘띠 까농에서는 패스티스 가니시로 민트 때로는 바질을 넣어 밋밋할 수 있는 칵테일에 초록빛을 더해서 손님들에게 선사하곤 했다. 학업을 마치고 곧장 귀가하는 게 아쉬운 우리 둘의 저녁길은 레드와인 그리고 패스티스와 함께 더 길어졌고, 그렇게 우리는 추억을 쌓아갔다.
나탈리 피셜에 따르면 패스티스는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여름에 자주 마시는 식전주라고 했다. 나탈리의 전 남자 친구이자 현 남편은 프랑스 남부 출신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프랑스 남부 문화를 매우 호의적으로 생각했고, 오히려 독일인이라기보다는 프랑스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나는 사실 패스티스를 즐겨 마시지는 않는다. 청량감은 좋은데, 맛이 어딘가 모자란다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패스티스만큼 내가 여름에 자주 마시는 칵테일 중에 비슷한 느낌의 바질 스매시(Basil Smash)가 있다. 이 바질 스매시를 볼 때면 민트 티를 좋아하던 나탈리가 자주 생각나고,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바질 스매시는 그녀의 고국 독일에서 탄생한 칵테일이다.
바질 스매시는 사실 위스키 스매시(Whisky Smash)를 본 따 만든 칵테일로 2000년대 초에 함부르크에서 탄생했다. 위스키 스매시는 미국의 대표적인 위스키인 부본(Bourbon) 위스키에 레몬, 시럽 그리고 민트를 방망이 살짝 찧어서 만든 칵테일인데, 나처럼 위스키 온 더 록스(Whisky on the rocks)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거부감 없이 마실 수 있는 칵테일이다.
이 칵테일은 사실 2008년 초 독일 남부 울름(Ulm)이란 도시에서 하리올프 스프롤(Hariolf Sporll)이라는 자가 블라우파즈 바(Blaupause Bar)를 개업하기 전 본인이 좋아하는 위스키 스매시와 비슷한 시그니처 칵테일을 만들기 위해 시험하던 중 2008년 5월, 바질을 주재료로 해서 만들었다.
두 달 후 독일 북부 함부르크 바 르 리온(Bar Le Lion)과 보일러맨(Boilerman) 바 오너이자 바텐더인 요그 메이어(Jorg Meyer)도 뉴욕에서 맛본 위스키 스매시와 비슷한 칵테일을 시그니처 메뉴로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이었다. 메이어는 바질, 진, 레몬주스를 주 재료로 한 바질 스매시를 만든 후 레시피를 본인의 SNS에 올렸고, 2008년 당시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했다. 실제 스프롤이 2달 정도 먼저 비슷한 칵테일을 만들었지만 SNS에 레시피를 올린 것이 메이어의 신의 한 수였을 까. 사실상 현재까지 바질 스매시의 창시자는 메이어라는 의견이 압도적이다.
대부분의 바질 스매시 레시피는 핸드릭스 진을 사용하는데, 지 바인(G’Vine)을 찾을 수 있다면 이 진을 권하고 싶다. 이탈리아가 원산지인 트레비노(Trebbino) 청포도를 주원료로 사용한 G’Vine은 콧대 높은 프랑스인들이 마스터 양조자인 쟝 세바스티앙 로비켓(Jean-Sebastien Robicquet)을 섭외하여 코냑 지방(프랑스 남서부 지역, 실제 와인 증류주인 코냑 생산지)에서 만든 진이다. 2006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이 진은 비싼 포도와 허브를 사용해서 만들었다고 한껏 자랑한 진이긴 한데, 사실 맛은 좀 싱겁고 묽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진은 아닌데 뭐랄까 청량감은 인정할만하다. 특이한 점은 와인처럼 청포도가 들어가서 살짝 더 달고 떫은맛이 있다. 이 진은 3가지 종류가 있는데, 처음 세상에 나온 초록색 레이블이 가장 유명하고, 그리고 바질 스매시랑도 잘 어울린다. G’Vine 웹사이트에도 바질 스매시 레시피가 있을 정도니 말이다.
[바질 스매시 재료]
지 바인 진 (G’Vine Gin) 60ml (물론, 핸드릭스 진을 사용해도 좋다.)
레몬즙 25 ml
시럽 20ml
6-8 바질 잎, 머들(Muddle)로 많이 으깨면 바질의 쓴맛이 나오기 때문에 이파리를 두 번 정도 찢어 쉐이커에 넣고 얼음과 함께 20번 정도 흔드는 게 좋다. 바질 잎으로 살짝 장식을 한다.
매년 5-6월이면 생각나는 나탈리. 초록의 여름처럼, 싱그럽다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친구이다. 나탈리는 2012. 6. 29 내 생일, 내가 좋아하는 마카롱과 함께 서툰 한글로 본인 이름을 써서 내게 선물했다.
정말 사랑스러운 그녀. 이 친구는 지금 멋진 파리지엥으로 사랑하는 남편과 건강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 모로칸 민트 티를 좋아한 그녀는 아마도 민트향과 비슷한 향긋한 바질향의 바질 스매시도 좋아할 것 같다. 곧 멀지 않은 미래에 패스티스 대신 바질 스매시를 벗 삼아 시간이라는 굴레에 벗어나 마음껏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싶다. 곧 그날이 오겠지. Ich vermisse dich.
참고문헌
1. Mixology.eu
https://mixology.eu/gin-basil-smash-story/
2. G'Vine Gin 웹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