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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앤 Sep 10. 2020

#7.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

젠틀 우먼(Gentlewoman)을 닮은 한 잔

소녀(少女), 여자(女子), 여성(女性)

묘하게 다른듯한 이 세 개의 동의어는 나를 비롯한 이 세상 인구 절반의 성(性, sex)을 부여하고 개념 짓는 말이다. 이 세 단어 가운데 가장 첫 단계로 분류되는 '소녀(少女)'의 사전적 의미는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계집아이'인데, 오히려 미성숙함이 흠이 아닌 매력으로 작용하고, 싱그러움을 부여하는 장식어 같다. 계집아이가 비로소 성숙한 단계에 이르러서야, 여자(女子)라고 불릴 자격이 주어지는데, 이 말은  어딘가 모르게 가벼운, 조금 불충분한 느낌이다. 계집아이의 태를 벗고 성숙한 사람에서 보다 더 완전히 성숙해지면 여성(女性)이라는 젠틀하고 시크한 수식어가 부여되는 것 같다.


내가 소녀였을 때, 나는 소년이 아니라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다. 삼신할머니의 농단도 엄마의 잘못도 아닌데, 나는 장손의 큰 자식이 남자가 아닌 여자라서 세상의 빛을 보았을 때부터 이마에 보이지 않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고로 친할머니라는 자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아이의 출산이 범죄행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들을 낳지 못한 죄인으로 취급받곤 했다. 딸 두 명을 자식으로 품에 안은 나의 부모는 친척들의 어리석은 잣대를 애써 무시하며, 나와 동생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다. 부모의 응원과 지지에도 불구하고, 나는 귓속에 구멍이 나도록 ‘네가 남자로 태어났어야 네 엄마를 고생시키지 않는데’같은 소리를 들었고, 내가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인 것처럼 말하는 그런 사람들을 종종 만났다. 그때마다 엄마는 커다란 방패가 되어주었다. 엄마의 유년시절, 유복하고 학식 있는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여서 항상 우선순위가 밀렸고, 20대 중후반 멋지게 하던 회사생활도 유부녀에서 예비 엄마가 된다는 축복받을 이유가 오히려 독이 되어 ‘당연히’ 사퇴하는 빌미가 되었으며, 별다른 선택 없이 그냥 엄마이자 아내로 본인의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그런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나와 동생에게 '주관이 뚜렷하고 당당한 사람이 돼라'라고 했다. 마치 여자로 불리기보다 여성으로 불리라는 듯이.  


2016년 출간된 소설을 원작으로 한 '82년생 김지영'이란 영화가 작년 국내 여성들 사이에서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이 영화를 82년생 여자 회사 동료와 함께 보았다. 나보다 5살 많은 그녀는 영화 초반에 ‘공유!’라며 환희했던 것도 잠시, 주인공 김지영 그리고 지영의 엄마를 보며 숨 죽여 흐느끼는 것을 반복했다. 공감이라는 것을 체질적으로 거부하던 나도 지영의 엄마가 지영이의 다른 면을 어쩔 수 없이 보고 슬퍼하는 장면을 맞닥 들였을 때, 두 눈이 뜨거워지며 오랫동안 흘리지 못했던 차갑고 무거운 눈물 방울이 양 볼을 타고 굴러가는 것을 느꼈다. 쪽팔리니깐 울지 말자고 쓸데없이 고집을 부렸던 자존심이 부질없었다.


'82년생 김지영'은 남녀 사이의 큰 논쟁이 되었고, 기존 남성의 시각으로 사회의 질서와 우선순위가 정해진 것에 대항하고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즘 운동으로까지 번졌다. 나는 페미니즘(Feminism)이니 마키즈모(Machismo)니 평생 논쟁하여도 해답을 찾지 못할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생각 자체로 피곤해지기에 쓰지 않겠다. 내가 김지영이라는 캐릭터를 들먹이며 말하고 싶은 것은 소녀, 여자, 여성은 어찌 보면 발전 단계와 상관없이 ‘애잔한 슬픔 그리고 주류사회에 대한 투쟁’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세상엔 김지영 같은 여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의 참정권 그리고 사회활동(진출이라는 말보다는 활동이 맞는 것 같다)이 많아지면서 젠틀한 느낌의 여성이 사회의 주류로 편성하기 시작했고, 90년대에 들어서는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한 다양한 영화 그리고 드라마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화려하고 세련된 분위기로 세상의 모든 여성들에 귀감이 되는 획기적인 미국 드라마가 있으니 바로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


캐리 브래드쇼 (Carrie Bradshaw)

1998년 6월부터 2004년 2월까지 약 6년간 HBO에서 절찬리에 방영하던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는 4명의 뉴욕 여성들의 삶, 섹스 라이프, 사랑 이야기 등을 총체적으로 다룬 드라마다. 그리고 패션, 트렌드, 뉴욕이라는 도시 그리고 맨해튼 여성(City women)들에 대한 환상까지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캐리가 시도 때도 없이 마시던 칵테일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의 인기까지 더해 거의 하나의 문화 패키지라고 해야 할까.

캐리 브래드쇼와 코스모폴리탄 (출처: Hind News)

하지만 나는 이 드라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지금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대학시절 섹스 앤 더 시티를 들먹거리던 친구들의 말에 공감도 하지 못했고, 이 드라마를 제대로 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었다. 사라 제시카 파커(Sarah Jesscia Parker)한테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주인공의 얼굴형과 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 드라마가 찬란한 여성성을 다룬 이야기라기보다 과소비를 조장하는 드라마로 왜곡해서 이해했었다. 나는 섹스 앤 더 시티가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며, 트렌드를 주도하던 시기에 혀 짧은 소리가 매력적인 영국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Jamie Oliver)의 '더 네이키드 셰프(The Naked Chef)'에 열광하던 시청자였다.


내가 섹스 앤 더 시티를 좋아하지 않은 것과 상관없이, 이 드라마는 코스모폴리탄이라는 루비 보석 같은 칵테일을 알리는데 크게 일조했다. 칵테일 잘알못도 코스모폴리탄은 한 번쯤을 들어봤을 거라 짐작될 정도니깐 말이다. 그만큼 섹스 앤 더 시티 그리고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고, 캐리를 워너비로 삼은 여성들이 바에서 단골 메뉴로 시키는 칵테일은 코스모폴리탄이라는 암묵적인 공식까지 생겼다. 잘은 모르겠지만 맨해튼 중심가에 살며, 보이지 않는 살육이 공존하는 경쟁이 치열한 그 도시에서 내일이 없을 것처럼 일하고, 섹스하고, 사랑하다가 4명이 친구들이 모이면 캐리가 메뉴판도 보지 않고 시키는 강렬한 핑크빛의 칵테일, 코스모폴리탄이 퍽이나 멋져보였던 모양이다. 이 핑크잔은 맛도 달달하면서, 보드카, 코안트로(Cointreau, 아니면 트리플섹(Triple-sec), 오렌지 리큐어)의 찐찐한 술맛이 끝을 마무리하는 그런 기분 좋은 칵테일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코스모폴리탄이야 말로 위스키 베이스의 맨해튼과 더불어 가장 미국적인, 아니 매우 뉴욕적인 칵테일이라고 생각한다. 감각적이지만 맛은 친근하고 가벼운 느낌이랄까.


하지만 나는 캐리라는 캐릭터를 좋아하지도 않고, 캐리가 별로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이 칵테일을 보면 떠오르는 다른 여성이 있다. 바로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A Simple Favor)'에밀리 넬슨(Emily Nelson)

A Simple Favor, 에밀리 (출처: IMBD)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블레이크 라이블리(Blakely Lively)는 유쾌하고 냉소적인 캐나다 아재 라이언 레이놀즈(Ryan Reynolds)의 부인이자 가십걸의 주인공, 그리고 나와 동갑내기인 키 큰 미국 배우로만 생각했다. 2019년 10월 타이베이에 놀러 갔을 때 숙소 근처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다. 강렬한 이야기 전개, 세련된 색감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고, 특히 악역으로 나오지만 여자 관객인 내가 봐도 첫눈에 반할 것만 같은 젠틀 우먼 에밀리가 우산을 쓰고 등장하는 모습은 압도적이었다. 나는 이렇게 슈트가 잘 어울리는 여자배우를 본 적이 없다. 비주얼만으로도 두 눈이 이미 포로가 되었으며, 성격은 거칠지만 군더더기 없는 섹시함, 그리고 절도 있게 마티니를 제조하는 장면은 100번도 넘게 반복 재생해서 봤을 정도로 말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A Simple Favor에서 에밀리가 집에서 마티니를 제조할 때 사용한 Aviation이란 진은 블레이크 라이블리의 남편인 라이언 레이놀즈가 공동 창업주로 만든 진이다.)


에밀리는 캐리와 다르게 진 마티니를 마시는 여성이지만, 상상을 해보았다. 흰색 슈트를 입고 마티니 잔에 담긴 코스모폴리탄을 들고 있는 에밀리의 모습을. 캐리보다 수천 배 멋진 것으로 결론을 냈다.


여성 바텐더의 베이비,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

다른 칵테일과 마찬가지로 코스모폴리탄의 탄생(origin ) 스토리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그 가운데 칵테일 역사학자인 게리 리건(Gary Regan)은 현재 코스모폴리탄의 배합(보드카, 코안트로, 라임주스, 크랜베리 주스)을 정립한 사람이 1985년 플로리다주 사우스비치의 스트랜드 레스토랑(Strand Restaurant)에서 여성 바텐더로 일하던 세릴 쿡(Cheryl Cook)이라고 주장했다. 1930년대 70년대에도 미국 메사츄세스나 미니애폴리스의 레스토랑에서 비슷한 칵테일이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때 당시에는 크랜베리 주스가 아닌 라즈베리 시럽을 썼기 때문에, 코스모폴리탄은 쿡이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 리건의 논리이다.


리건은 쿡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왜 이 칵테일을 만들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이름을 코스모폴리탄으로 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쿡은 이렇게 설명했다.


“마티니를 주문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티니 잔’을 든 모습으로 보이길 원했는데, 그때 느꼈다. 마티니 말고 고급스럽게 맛을 느끼면서(palate) 시각적으로 굉장히 아름다운(stunning) 칵테일을 마티니 잔에 담아보고 싶다고.
이게 내가 코스모(Cosmopolitan)를 만든 이유다.’


“이 칵테일의 이름이 코스모(Cosmo)인 것은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 잡지) 잡지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이 잡지에서 여성 레스토랑 지배인(Maitre D’s)을 소개하는 에디션이 있었는데, 그 걸 보고 핑크빛 칵테일의 이름을 코스모폴리탄으로 붙여야 겠다고
생각했다.”


쿡은 돋보이는 액세서리 같은 칵테일을 연상하며 코스모폴리탄을 만든 거 같다. 그리고 쿡의 레시피에서 크랜베리 주스의 양은 '적당히 핑크빛이 돌 정도'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헤픈 핑크의 모습이 아닌 절도있는 핑크를 염두한것 같다. 아마도 쿡은 완전히 성숙한 여성을 생각하면서 그 안에 여자와 소녀를 모두 포함시킨, 궁극적인 여성상을 이 칵테일로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마치 바에 멋지게 서있지만, 사연이 많은 젠틀 우먼처럼.

영국판 코스모폴리탄, 나는 개인적으로 리타오라를 좋아해서 이 표지를 가지고 왔다.

그래서 그런지 코스모폴리탄은 클래식 칵테일 중에서 가장 색감이 뛰어나고 예쁘다. 젠틀맨에 견줄만큼 슈트발이 잘 어울리고 매력적인 중후한 도시의 여성처럼. 입맛이란 사실 남녀를 구분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통상 말하는 상콤하고 달달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여성이 많다는 편견 섞인 인식(anecdote)으로 보자면, 코스모폴리탄은 단연 친여성적인(female-friendly) 칵테일이다. 실제로 코스모폴리탄은 대게 여성들이 주문하는 칵테일이기도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코스모폴리탄을 그렇게 즐겨 마시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적당히 알딸딸한 느낌이 들 때면 마치 무슨 공식처럼 무조건 코스모폴리탄을 주문한다. 그래서인지 술로 인해 어느 정도의 뻔뻔함을 탑재한 용기가 생기고, 핑크 혐오자라고 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코스모폴리탄을 주문한 후 내가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사귀자고 고백한 적이 꽤 된다. 내  연애의 시작, 그 8할은 코스모폴리탄의 도움이라고 해도 과장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매끈하게 빠진 마티니 잔이 내 앞에 수줍은 핑크빛을 뽐낼 때, 한참 모자란 나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 상쇄할 것 같은 장식품 같아서 그래서 코스모폴리탄을 시키곤 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여자아이라서 구박받았던 조금 아픈 기억들도 여성성을 축하하는 코스모폴리탄 한잔이면 조금씩 씻겨 내려갈 것 같아서, 그래서 이 칵테일을 마신다.


코스모폴리탄 레시피

[코스모폴리탄 재료]

스미노프 보드카(Smirnoff Vodka) 45ml

쿠안트로(Cointreau) 15ml

오션 스프레이 크랜베리 주스 (Ocean Spray Cranberry Juice) 40ml

라임즙 15ml


보드카, 쿠안트로, 크랜베리 주스, 라임즙을 순서대로 쉐이커에 넣고 얼음을 4-5개 정도 추가한 후 20회 정도 흔든다.

마티니 잔에 칵테일을 붓고, 레몬 껍질로 장식한다. (안 해도 괜찮다.)


여성 바텐더가 만든 여성을 축하하고 축복하기 위해 만든 칵테일, 코스모폴리탄. 이 감각적인 칵테일은 나처럼 핑크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포용하는 매력이 있다. 캐리는 친구들과 늦은 뉴욕의 밤 시끌벅적한 바에서 마시곤 했지만, 나에겐 마치 젠틀 우먼인 에밀리가 바쁜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해 자신과의 독백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며 보낼 것만 같은 칵테일이다.


젠틀맨보다 더욱더 매력 있는 세상의 모든 여성들을 위하여.


참고 문헌

1. Gaz Regan 웹사이트

http://www.gazregan.com/tag/cheryl-c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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