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는 세상에서 가장 긴 열대지역에 있는 섬나라(archipelago)다. 내가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는 자바 섬(Java Island) 북서 연안에 있다. 적도를 가로지르며 길게 늘어진 이 섬나라는 시간대도 다양하다. 예를 들면 발리가 자카르타보다 한 시간 빠르다.
이 나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인도네시아가 동남아에서 가장 큰 국가이며, 무려 3억 명에 육박하는 인구가 살아 숨 쉬는 세계 4위의 인구대국이자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인 것에 놀랐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모호한 느낌으로 그렇게 2013년 10월 자카르타에 도착했다.
인도네시아를 말하기 전, ‘동남아’라는 개념을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지역이 북미도 아니고 유럽도 아닌, 동남아라는 곳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지역을 야자수와 해변이 가득한 휴양지로 이해하는 것 같다. 다양한 나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지역을 동일 국가로 이해하며, ‘동남아’를 일국으로 치부하는 사례도 종종 목격했다.
사실, 동남아라는 개념은 18-19세기 이 지역을 점령하러 슬금슬금 기어들어온 서구 열강들에 의해 정립되었다. 그들이 보기엔 서유럽을 기준으로 아시아지역에 있는 남(South) 동(East) 쪽에 있는 땅이라서 ‘동남아시아’로 개념화한 것이다. 땅따먹기에 혈안이 되어있던 당시 무자비한 서유럽의 위정자들이 보기에 동남아라는 곳은 나라의 개념도 없고, 문명이 덜 된 인간의 모습을 한 미개인들이 살고 있는 땅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유럽인들만의 오만한 생각이었다. 침략자들이 이 곳을 오기 전 이 지역에 있는 여러 공동체들은 부족 또는 왕족 사회로 이루며 잘 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온화한 기후와 높은 강우량으로 과일나무도 알아서 잘 자라고 풍부한 쌀 경작이 가능한 이 곳이 무엇이 부족해서 서로 치고받고 싸웠겠는가. 피 냄새로 진동한 유럽의 잔혹사와는 사뭇 다른 평화로운 열대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 영국, 미국이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나라라는 개념이 억지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과거 인도네시아, 그러니까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Dutch East Indies)는 사회 또는 세계사 시간에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보유한 거대한 토지 또는 부동산에 불과했으며, 사실 인도네시아라는 나라는 1947년 독립 이후 만들어진 신생국이다. 이 나라는 다양한 부족 그리고 언어와 종교를 보유하고 있는 대국이며, 대부분의 대국이 그렇듯 ‘조화로움’을 국민에게 주입시켜‘다양 속의 단합(unity in diversity)’ 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우선 내가 살아온 나라들과 여러모로 다르다. 이제는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 형체 없는 GDP 기준으로 잘라 경제적 개념의 저개발국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정돈되지 않고 마음대로 발전된 이 나라의 어수선한 분위기 그리고 융통성이 곧 시스템인 이 곳은 내가 청소년기를 보내온 국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규칙은 이를 집행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좌지우지되니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까. 정답보다는 해답이 필요한 이 곳 인도네시아는 아직도 어색한 나라다.
내가 7년째 살고 있는 이 도시, 자카르타는 내게 영감이 아닌 짜증만 부여하는 그런 도시라 그런지, 나는 자카르타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후덥지근한 기후는 참아줄 만한데 우선 나의 편도와 폐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대기오염, 불쾌한 변비 같은 교통체증, 산책은 고사하고 하수시설도 영 엉망인 이 곳은 통상적으로 말하는 삶의 질을 여러모로 낮추는 요소를 골고루 갖춘 곳이다. 처음 초반 1-2년은 매일 짜증을 내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인도네시아어를 배우는 것도 흥미가 없었고, 그냥 돈 좀 벌어보자는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꾸역꾸역 살았다. 결국 그러다가 3년째 되던 해 갑상선 기능 항진증 판정을 받으면서, 인도네시아를 떠날 생각까지 했었지만, 사정상 그렇게 하지 못했고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라고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상황 탓이 아닌 나의 마음가짐을 바꾸기로 말이다.
퇴근길 자카르타
버마에서의 날들 (Burmese Days)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생각만큼 쉽게 생기지 않아 고군분투하고 있었을 때, 우연히 회사 도서관에 꽂힌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장편소설 '버마에서의 날들(Burmese Days)'을 발견했다. 이 소설은 제목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 버마(현재 미얀마)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작가 본인이 실제 버마에서 1922-27년간 대영제국의 경찰관으로 살면서 느낀 감정들과 경험을 고스란히 글로 옮긴 작품으로 오웰 특유의 비판적이고 날카로운 글투, 그림 같은 묘사가 두드러지는 문장이 탁월하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마치 20년대 버마가 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는듯했다.
버마에서의 날들 (1934년작)
'버마에서의 날들'은 존 플로리(John Flory)라는 30대 중반의 영국인 목재상의 관점으로 사건이 시작된다. 플로리는 버마의 짜둑더다(Kyauktada) 항구도시에 인싸로 살아가는 우월한 백인 양반으로 유럽인들로 구성된 프라이빗 사교모임의 일원이다. 사건은 짜둑더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탐욕스러운 미얀마 장군이 플로리의 친구인 인도계 베라스와미(Veraswami) 의사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그를 동네에서 내쫓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작품은 현지인(버마인)들의 부조리와 부정부패, 침략자(백인 영국인들)들의 오만한 우월감에 둘러싸여 복잡한 심정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소설의 줄거리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플로리라는 사내의 중심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 미지지근한 로맨스, 그리고 당시 제국주의의 소용돌이에서 어떻게든 이득을 얻으려고 했던 탐욕스러운 계층들 간의 갈등으로 이루어진 옛날 작품이지만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오웰의 통찰력은 마치 현대에도 유효하다는 나의 찬사로 이 책을 마무리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리고 읽은 다음 나 역시 플로리가 처한 환경과 유사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인간 자체가 태생적으로 열등감 - 플로리는 얼굴 왼쪽에 크게 자리한 모반(birthmark)으로 외모 열등감이 높은 인물 - 이 높은 한낱 미물에 불과한데, 이런 나도 조상에게 물려받은 피부색과 생김새로 인해 이 곳, 인도네시아에서는 나름 대접받는 대상으로 디폴트(default)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분수 넘치는 환경에서 나라는 인간은 주제 파악하지 못하고 건방진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도대체 내가 누구라고 이 나라가 오랫동안 행해온 관습과 문화를 함부로 판단하고, 내가 그렇게 혐오하는 식민 사상에 동조하고 있는가.
10대와 20대 초반 힘없고 나약한 동양 여자라는 비주류인의 신분으로 내가 동경했던 - 지금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 서구 사회에서는 초라하게 찌그러져 있었으면서, 내가 단순히 불편리하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주제넘은 짜증을 함부로 부려대고 설익은 우월감을 앞세워 인도네시아인들을 현지인으로 싸잡아 대놓고 무시하는 나의 아둔하고 어리섞은 모습을 '버마에서의 날들'을 통해 마주하게 되었다.
자카르타에서의 날들
이 곳 자카르타도 소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세월은 변했지만 여전히 서양인들은 왕처럼 대접받는 도시다. 내가 정말 신기하면서도 씁쓸하다고 느낀 것은 자카르타 시내에 있는 쇼핑몰에 입점되어있는 대부분의 레스토랑이 인니어 메뉴가 아닌 영어 메뉴만 있다는 점이다. 레스토랑 초입에 있는 메뉴로 입장 가능한 자와 가능하지 못한 자를 구분 짓는 듯한 그 경계. 원유국이지만 기술이 없어 정유를 수입하는 이 나라엔 길거리의 가로등 불빛은 없어도 쇼핑몰의 빵빵한 에어컨과 눈이 부실듯한 할로겐 조명은 꺼지지 않는다.
한국에서의 호의호식(好衣好食)은 거의 불가했겠지만 나는 이 곳 자카르타에서 돈 좀 있을 것 같다는 외국인이라는 신분 덕에 비싸고 좋은 곳들이라고 불리는 곳을 내 집 들락날락거리듯 했다. 직업상 별 의미 없는 회의와 연회는 5성급 호텔에서 치러지기에 나는 자카르타의 현실은 부정한 채 내 주변을 둘러싼 호화로운 생활이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그렇게 얄팍하고 어쭙잖게 지냈었다. 지금은 이런 곳들도 시시하고, 솔직히 순간의 호화로움과 떠듦은 영속적이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몇 년 전부터는 외출 자체에 흥미를 잃었다.
자카르타는 걷는 것이 매우 불편한 곳이다. 도보가 거의 없는 도시니깐. 그나마 도시에 깔린 도보를 걸을 수 있는 곳은 SCBD라는 시내이다. 이 곳은 출퇴근 자가용으로 붐비지만 트랜스 자카르타(Trans Jakarta)라는 만원 버스에 몸을 낑겨넣고 출퇴근하는 서민들도 있고 작년부터는 자카르타 최초의 지하철을 개통해서 개찰구도 몇 개 보이는 흡사 광화문이랑 비슷한 도심지역이다.
내가 언제까지 이 곳에서 대접받는 이방인으로 살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내 한 몸뚱이 열심히 움직여 모든 일을 스스로 해야 할 가능성이 높기에 어울리지 않는 시건방은 그만 떨기로 했다. 나 역시 평범한 시민에 불과하며, 단순히 상대적으로 부유한 경제지표를 자랑하는 나라에서 왔다고 해서 나 따위의 본질이 갑자기 업그레이드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퇴근길은 택시가 아닌 버스, 지하철 그리고 도보를 택하기 시작했다. 3년 동안 엄지발가락이 휘도록 하이힐을 신고 택시를 다녔는데, 힐을 벗고 운동화를 신었고, 걷기 힘든 이 도시에 내 두 발을 붙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걸을 때 온몸으로 느껴지는 자유로움이란 실로 굉장한 희열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30분 남짓 걸으면 열대지방 특유의 후덥지근한 날씨 탓에 흥건한 땀방울이 온몸에 맺히고 결국 뭔가 시원한 것을 애타게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친다. 수디르만 도로를 건너 SCBD 초입에 도착하면 바와 몰들이 즐비한데, 내가 자주 가는 바는 가격도 괜찮은 미스터 폭스(Mr Fox)라는 곳이다.
Mr Fox Jakarta (출처: Zomato)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쓸데없이 퇴근길에 파워워킹을 해서 유난히 더운 날들이 있다. 얼굴에는 이미 한바탕 땀으로 흥건하고 옷은 이미 끈적해진 살갗에 붙어 정전기처럼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그런 때가 말이다. 그럴 때마다 가장 만만한 Mr Fox에 들어서자마자 메뉴판도 보지 않고 주문하는 칵테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메리카노(Americano)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리고 007(더블 오 세븐)
나는 개인적으로 커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정말 질색한다. 커피란 '모름지기 뜨겁게 먹는 것'이라는 내 철칙이 있기에 여름에도 뜨거운 커피 그리고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한 번도 차가운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다. 하지만 동명이주(同名異酒)인 아메리카노 칵테일은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아메리카노 역시 앞서 설명한 네그로니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칵테일이다. 재료 역시 비슷한데, 아메리카노는 진(gin)이 빠진 캄파리(Campari)와 스위트 베르무스(Sweet Vermouth) 그리고 탄산수가 주 재료이다. 오렌지 빛의 붉은색이 퍽이나 아름다운 이 칵테일은 1860년대 밀라노의 바 카페 캄파리(Caffe Campari)란 곳에서 바텐더 가스파르(Gaspare)가 만들었다. 이 칵테일이 이름이 느닷없이 미국인(아메리카노)인 것은당시 밀라노를 방문하던 미국 관광객들이 즐겨마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메리카노가 탄생하기 전 이미 이탈리아에서는 이 나라의 대표적인 식전주인 캄파리와 스위트 베르무스를 1:1 비율로 배합하여 마시던 밀라노-토리노라는 칵테일 비스무리한 것이 있었다. 캄파리(Campari)는 밀라노의 대표적인 술이고 토리노의 대표적인 스위트 베르무스인 푼트 에 메스(Punt e Mes)를 섞었다고 해서 칵테일 이름을 밀라노-토리노라고 지은 모양이다.
푼트 에 메스 & 캄파리 (출처: Wikipedia)
치열한 일상을 마치고 석양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제격인 아메리카노는 사실 제임스 본드 (더블오 세븐)가 자주 마시던 칵테일이다. 카지노 로얄의 베스퍼(Vesper, 마티니 베리에이션)의 아성이 너무 커서 ‘본드하면 마티니’라는 암묵적인 공식이 생겨났지만 사실 원작 소설의 본드는 - 정확히 말하자면 원작자 이안 플레밍 -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시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술맛이 강하게 느껴지는 칵테일을 선호하는 더블오 세븐이 그나마 가볍게 즐기던 칵테일이 바로 이 아메리카노이다. 섹시하지만 까탈스러운 스파이는 이탈리아 탄산수가 아닌 프랑스의 탄산수 페리에(Perrier)를 넣은 아메리카노만 취급한다. '싸구려 독주에는 고급 탄산수를 넣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 때문에.
007 위기일발 (From Russia with Love, 1963년 ),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는 007
아메리카노 레시피
아메리카노
[아메리카노 재료]
캄파리(Campari) 45ml
마티니 로소(Martini Rosso) 45ml
페리에(Perrier) 50-60ml
레몬 껍질 1장
원래는 콜린스 잔에 캄파리와 로소를 동량으로 붓고 페리에로 잔을 채운 다음 레몬 껍질로 장식하는 것이 정석인데, 나는 조금 더 부드러운 질감을 좋아한다. 그래서 캄파리와 마티니 로소를 쉐이커에 넣고 얼음과 함께 10번 정도 신나게 흔들어준 다음 얼음을 채운 콜린스 잔에 칵테일을 먼저 붓고 그 위를 페리에로 채운다. 잔 위에 부드러운 거품이 생긴다.
꾸밈없는 단순한 하지만 강렬한 칵테일, 아메리카노. 나름 치열했던 하루를 마무리하며 소소한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그런 녀석이다. 나는 본드만큼 멋지지 않고, 플로리처럼 인싸는 아니지만, 복잡하고 어수선한 이 곳 자카르타에 사는 동안 소소한 시민으로 살아가자고 그렇게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