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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앤 Oct 06. 2020

#11. 화이트 레이디 (White Lady)

어색한 기분(氣分)

모든 것은 기분(氣分)이 기준

내게 있어 기분은 매우 중요한 척도이다. 내가 습관처럼 하는 말은 “I am in the mood for something.” 그리고 그의 반대말인 “I am not in the mood.” 

사교를 즐기지 않는 성격이긴 하지만 흔히 말하는 번개를 거절할 때 거짓말이 아닌 '영 기분이 아니다.'라는 말로 둘러댄다. 성가신 사회생활에서 상당히 유용한 말인 것 같다. 물론 아니꼽게 보는 자들이 많긴 하지만.


먹고 마시는 것도 그렇다. 매일매일 당기는 맛이 다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식단이란 개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제약이라고 해야 할까. 유학생 시절, 맛보다는 돈 절약이 중요했던 시절이라 일주일 단위로 식단을 짜서 장을 보았다. 공용 주방에 재료를 보관하고, 먹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1주일 식단을 철저히 지키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내 손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다짐한 것이, '다른 것에는 돈을 아껴도 먹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말자'였다. 나는 화장도 안 하고, 가죽으로 만든 가방도 필요 없고 쓸데없는 장신구와 옷도 필요 없는 인간이므로, 오로지 나의 소비 그리고 간혹하는 과소비의 대상은 바로 먹고 마시는 것이다. 정말 기분 내키는 대로 매일 다른 것을 만들어 먹거나 사서 먹는 즐거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기분에 따라먹고 마시는 행위란 곤히 잠자고 있는 뇌파가 깨어나 지독히도 심심한 나의 일상에 쾌락과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인 것 같다.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내 머리와 가슴속에 정처 없이 떠도는 단어 조각들이 내 생각을 어지럽히고 터져버릴 것 같은 감정이 들 때가 있다. 이 기분은 반드시 백지에 가득 채운 글을 봐야만 직성이 풀리기에 돈 받고 하는 노동의 시간을 약간 훔쳐 내 기분에 할애한다. 회사에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지 않으면 내 기분이 상하니 말이다. 그래서 내 업무일지의 반은 불현듯 스치는 생각의 잔상으로 가득하다. 화산 폭발처럼 터져버린 감정은 이성의 질서도 무시한 채 공책의 날카로운 선을 넘어서고 아슬아슬하게 중앙선을 침범하듯 그리고 완전히 게워내듯 그렇게 낱말을 뱉어낸다. 감정 받아쓰기를 당한 종이는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지고 마치 낙서 같지만, 나의 복잡하고 쓰지 못할 실타래처럼 얽혔던 기분은 이 행위를 마무리할 때쯤 자연스럽게 풀린다. 내가 글이 잘 써지는 날들은 대부분 슬프거나 화가 많이 나는 그런 날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인간은 이별할 때, 싸웠을 때 슬픔 속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겠다는 이상한 변태 같은 고집을 부린다.


그런데 요즘 내 문제는 마음속이 너무 평온하다는 것이다. 슬픔도 노여움도 느껴지지 않아, 글이 정말 안 써진다. 그래서인지 나의 문장들은 형용사를 모두 실종하고 말았다. 열흘이 넘어도 들지않는 기분을 어찌해야할지 모른채 억지로 한 자를 쓰려고 공책과 노트북을 펼쳤다. 나랑 어울리지 않는 기분에 항복하지 않으려고 말이다.


불편리함의 랩소디

10일 전 이사를 하고 나서부터다. 아무런 기분이 생기지 않는 것이.


이 전에 나는 크고 작은 바퀴벌레 40마리가 15일 동안 끊이지 않고 출몰하던 오래된 아파트에서 3년을 살았다. 그 아파트는 자카르타 시내 에피센트룸(Epicentrum)이란 곳에 위치하였고, 18개의 동이 있는 나름 대규모 아파트 단지였다. 그런데 이 곳은 1990년에 지어진 곳이라 매우 낙후되었고, 하수시설도 엉망이어서 냄새가 진동했고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하수도에 들어간 건지 화장실에 들어간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그리고 매일 아침 커튼을 치면 내 앞에 장대하게 펼쳐진 대규모 묘지까지. 정말 '별로'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이사 갈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중에 올해부터 회사 내규가 바뀌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회사가 직접 부동산과 계약해서 환경이 쾌적한 아파트와  수 있다는 소식을 말이다.


약 두 달 간 신축 아파트탐방 하고, 심사숙고 끝에 지금의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2020년 2월에 완공된 완전 새 아파트.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 집에 들어온 날부터 잠이 안 오고,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말 아무런 생각과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억지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잘하지 않는 곱씹음을 하게 된다. 나의 손가락을 제동하는 곱씹음.


이유를 모르겠다. 그냥 내가 이 집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아직은 이 집과 친해지지 않은 어색한 사이라고 해야 할까. 내 몸은 편해졌고, 내 두 눈으로 보이는 주변 환경은 너무나 쾌적한데, 무엇이 부족하길래 나는 I am in the mood for writing anything at all 일까.


누가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조금 불편리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한다. 모델하우스 또는 인테리어 잡지처럼 완벽히 갖추어진 곳에 가면 이상하게 괜히 저기압이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쓸데없이 호사를 누리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호텔도 좋아하지 않는다. 5성급 호텔에서 일한 것도 있고, 쓸데없이 호화로운 이 숙박장소에 가면 이상하게 불편하고 기분이 언짢다. 반대로 주변이 지저분하거나 불완전하면 그 부족함과 불편리함 속에 편안함이 느껴진다. 마치 완벽하지 않은 나 자신처럼 말이다.


불편함 속에서는 즉흥적인 랩소디처럼 시간을 초월해 글을 쓸 수 있었는데, 지금은 억지로 해야 한다니, 이 무슨 애로사항인가.


현실 부정

자카르타 시내 (수디르만) (출처: Global Government Forum)
저 위의 사진 뒤 기찻길에 있는 자카르타 슬럼가 (출처: Jakarta Post)

인도네시아, 아니 자카르타, 이 곳은 빈부 격차가 심한 곳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솔직히 말해 인도네시아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허황된 거짓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대리석 바닥, 그리고 아무도 걷지 않는 복도를 눈이 부실 정도로 환히 밝히는 할로겐 조명하며, 락스를 잔뜩 넣은 육안에 깨끗한 물이 가득 찬 수영장은 내가 자카르타 시내 아파트 주민이 아닌 호텔 투숙객으로 만들어버린다.


매일 아침 아파트 대문을 나서면 즐비하게 늘어진 좌판상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새벽부터 땡볕 아래 자기 몸만 한 작은 리어카에 기대어 뜨거운 고기 완자 수프와 볶음밥(나시고랭, 인도네시아어로 나시는 쌀을, 고랭은 볶음을 의미))을 만들어 오젝(오토바이 택시) 기사와 택시기사들에게 판다. 나보다 훨씬 부지런한 좌판상들이 뜨거운 뙤약볕을 이겨내며 생계를 위해 파는 볶음밥과 완자 수프는 한국 돈으로 천 원도 하지 않는다. 좌판상들이 가족을 부양하고 하루를 연명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50그릇 이상을 팔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카르타가 개발도상국의 수도라고 해서 결코 물가가 싼 곳이 아니다. 


내가 재래시장이 아닌 슈퍼마켓을 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혼잡한 거대 도시는 서울 그리고 런던 못지않게 식료품 가격이 비싸고, 종류도 많지 않다. 그만큼 선택폭이 좁기에 나는 비싼 것을 알면서도 나의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바가지를 당하며 원하는 식재료를 구입한다. 새벽부터 나와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나와 장사하는 좌판상과 달리 나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사방을 통풍하는 장소에서 양손 가득 장을 보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요리한다.


이 도시 자카르타. 내가 3년간 매일 불평불만을 하면 지냈던 아파트를 훌쩍 떠났는데, 이상하게 나는 그 오래된 아파트에서 책상도 없이 바닥에 앉아 시간 가는지 모르고 글을 썼을 때가 그립다. 굳이 생각을 쥐어짜지 않아도 불편함 속에서 솟구치는 기분에 기대 글을 썼던 그 날들이 말이다.


하루 사이에 머리와 기분이 따라잡을 수 없는 필요 이상의 안락함을 느껴서인지, 이사한 당일 짐 정리가 새벽 2시에 끝났는대도 잠을 못 잤다. 그리고 나의 불편증은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형. 이런 희한한 기분을 칵테일로 표현하자면 내가 평소에 잘 마시지 않는 화이트 레이디(White Lady)인 것 같다.


엘레강스한 그 자체, 화이트 레이디

화이트 레이디는 진, 계란 흰자, 쿠안트로, 레몬즙이 들어가는 상큼한데 묵직한 칵테일이다. 그리고 계란 흰자를 넣고 쉐이커를 흔들어 Coup잔에 따를 때 느껴지는 부드러움은 굳이 맛을 보지 않아도, 부드러운 우유거품을 윗입술로 느끼는 것만 같은 폭신하고 황홀한 그런 기분이다.


화이트 레이디는 스코틀랜드 북부지방의 소도시 던디(Dundee) 출신의 바텐더 해리 맥엘혼(Harry McElhone)1919년 런던의 씨로 클럽(Ciro Club)에서 처음 선 보인 칵테일이다. 멕헬혼이 이 칵테일을 처음 만들었을 때는 진이 아닌 민트 술(Creme de Menthe)을 사용했고, 트리플 섹(오렌지 술) 그리고 레몬즙이 사용되었다. 1923년 파리의 바를 인수해 자신의 이름을 건 바 Harry’s New York Bar를 개업하면서 민트 술 대신 진(Gin)을 쓰기 시작했다. 진으로 원래 화이트 레이드엔 없었던 드라이함(술 특유의 텁텁한 알코올 맛)이 추가되었다. 20년대에 리메이크된 화이트 레이디는 그의 단골들이 자주 찾는 칵테일이었다고 한다.


이 칵테일의 질감을 조금 더 묵직하게 만 계란 흰자를 넣기 시작한 때는 1930년대, 그리고 탄생지는 바로 칵테일의 성지로 유명한 런던 사보이 호텔이다. 또 다른 해리, 바로 칵테일의 조상이자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국 출신의 바텐더 해리 크래독(Harry Craddock)-칵테일의 족보 혹은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Savoy Cocktail Book을 집필한 칵테일 전문가 겸 바텐더-이 기존의 레시피에 진을 조금 더 추가했고, 당시 바 매니저였던 피터 도렐리(Peter Dorelli)가 부드러운 질감을 위해 계란 흰자를 넣자고 제안하면서 21세기에도 맛볼 수 있는 화이트레이디 재탄생 되었다.


나는 평소에 화이트 레이디를 잘 만들지도 그리고 마시지도 않지만, 또 정작 만들 때는 불필요하게 엘레강스함을 추구한다. 나는 일반진이 아닌 프랑스 코냑 지방에서 생산된 G'Vine진을 사용한다. 초록색 이 좀 별로지만 가격만큼은 어이없이 비싼 이 진은 청포도를 베이스로 만들어서 포도의 달콤하고 상큼한 맛이 진의 특유한 술맛과 어우러져 화이트레이디를 만들기에 제격이기 때문이다. 이 칵테일은 내가 마시기보다 만들기 더 좋아하는 손님 접대용 칵테일이다. 계란 흰자(나는 1/4만 넣는다. 안 그러면 비려서 비추)를 넣으면 칵테일이 크림처럼 부드러워지기 때문에, 완성품을 잔에 따르면 손님들의 탄성을 자아낼 수 있다.

G'Vine Gin


시각적으로 멋지지만 맛과 질감은 묵직한 화이트 레이디. 나는 청량한 칵테일을 선호하는 사람이기에, 이 칵테일은 자주 마시기엔 부담스럽다. 이렇듯 나 역시 안락함과 무료한 평온함이 무겁다.

나는 길거리의 좌판상보다 선택의 폭이 넓은 사람이기에 편리한 시설과 쾌적한 환경을 누릴 수 있지만 결코 이 장소는 내가 아님을 알고 있기에. 나는 언제든 내 사지가 불편한 곳에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절대 표면적인 물질적 안락함에 항복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이번 주를 마지막으로 당분간 화이트 레이디는 마시지 않기로 했다. 솔직히 기억도 안날 것 같다.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엘레강스함은 한 번의 경험으로 충분하니 말이다. 내가 다시 솔직한 나 자신으로 돌아가 무질서하게 글을 쓸 수 있길 기대하며, 오늘 밤을 마무리한다.


화이트레이디 레시피

[화이트 레이디 재료]

G'Vine 진 (G' Vine Gin) 45ml (비프이터나 고든도 괜찮다.)

쿠안트로 (Cointreau) 30ml

레몬즙 (Lemon Juice) 20ml

시럽 (Simple Syrup) 10ml

계란 흰자 1/4

비터 오렌지 (선택)


쉐이커에 진, 쿠안트로, 레몬즙, 시럽을 넣고 얼음을 넣은 후 10번 정도 흔든다 (일명 드라이 쉐이커 과정).

쉐이커를 열어 얼음을 제거하고 술을 일반 잔으로 분리한다. 물로 한번 헹군 쉐이커에 계란 흰자와 얼음 1-2개 정도를 넣고 15회 정도 섞은 후 깨끗한 잔에 칵테일을 붓는다. 비터 오렌지로 장식한다.


참고문헌

1. History of the White Lady

https://makemeacocktail.com/blog/the-history-of-the-white-l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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